조현식 열사는 1993년 경기도 광주 노동법률상담소 기획부장, 1997년 ’광주지역 일하는 사람들‘ 2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노동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활동가였습니다.
1997년 미국은 IMF 구제금융을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본격화하며 정리 해고/파견제로 노동자의 삶을 붕괴시켰고, 금융 시장 완전 개방/국가기간산업 민영화로 한국 경제의 열매를 완전히 종속시켰습니다. 이에 1998년 5월, 조현식 열사는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권력이 강요한 실업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 자체가 가장 어려운 노동자들이 바로 건설노동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조현식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건설노동자들이 더 이상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투쟁하며 조직하고 교육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산림청의 숲 가꾸기 공공근로 사업에 800여 명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조합원의 날 (1998년 12월 25일)에 숲 가꾸기 사업 설명회를 개최하고 자신의 월급봉투를 내놓으며 우리 조합원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하 사무실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자 숲 가꾸기 사업 참여 희망자들인 조합원들의 명부와 서류를 챙기기 위해 다시 화마속으로 들어갔다 쓰러져 4일 만에 끝내 운명하였습니다.
노동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천대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던 그의 마음은 건설노동자의 마음속에 계승되었고, 건설노조는 이제 노동운동의 자랑스러운 선봉대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7년 미국은 IMF 구제금융을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본격화하며 정리 해고/파견제로 노동자의 삶을 붕괴시켰고, 금융 시장 완전 개방/국가기간산업 민영화로 한국 경제의 열매를 완전히 종속시켰습니다. 이에 1998년 5월, 조현식 열사는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권력이 강요한 실업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 자체가 가장 어려운 노동자들이 바로 건설노동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조현식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건설노동자들이 더 이상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투쟁하며 조직하고 교육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산림청의 숲 가꾸기 공공근로 사업에 800여 명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조합원의 날 (1998년 12월 25일)에 숲 가꾸기 사업 설명회를 개최하고 자신의 월급봉투를 내놓으며 우리 조합원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하 사무실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자 숲 가꾸기 사업 참여 희망자들인 조합원들의 명부와 서류를 챙기기 위해 다시 화마속으로 들어갔다 쓰러져 4일 만에 끝내 운명하였습니다.
노동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천대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던 그의 마음은 건설노동자의 마음속에 계승되었고, 건설노조는 이제 노동운동의 자랑스러운 선봉대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지를 기분 좋게 하는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하하하.”
제종철 열사는 한국외대 졸업 후 의정부/동두천에서 청년단체를 결성하고 노동운동과 함께 미국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주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가 2명의 여중생을 압살한 사건이 벌어지자 제종철 열사는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의정부의 작은 촛불을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로 만들어냈습니다. 살인 미군들에게 무죄를 평결한 미국의 행태에 분노한 촛불 민중은 미국 대사관을 둘러쌌고 미국 부시 대통령은 공식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11월 20일 제종철 열사는 의정부역 철길 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고사로 수사를 종결했지만, 자살 동기가 없고 시신 훼손이 거의 없는 점등 여전히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한때 사회 변화를 이끌던 386 세대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적지않이 기득권화되었지만, 끊임없이 낮은 그곳을 향해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진보 집권을 일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종철 열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종철 열사가 일으킨 거대한 촛불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굴욕 협상 반대 촛불,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이 되어 한국 사회 변화의 동력은 거대한 민중의 힘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제종철 열사는 한국외대 졸업 후 의정부/동두천에서 청년단체를 결성하고 노동운동과 함께 미국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주민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가 2명의 여중생을 압살한 사건이 벌어지자 제종철 열사는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의정부의 작은 촛불을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로 만들어냈습니다. 살인 미군들에게 무죄를 평결한 미국의 행태에 분노한 촛불 민중은 미국 대사관을 둘러쌌고 미국 부시 대통령은 공식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11월 20일 제종철 열사는 의정부역 철길 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고사로 수사를 종결했지만, 자살 동기가 없고 시신 훼손이 거의 없는 점등 여전히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한때 사회 변화를 이끌던 386 세대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적지않이 기득권화되었지만, 끊임없이 낮은 그곳을 향해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진보 집권을 일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종철 열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종철 열사가 일으킨 거대한 촛불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굴욕 협상 반대 촛불,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이 되어 한국 사회 변화의 동력은 거대한 민중의 힘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 학습하고 실천했던 나날들이 말입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고등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버스 안내원이 된 박영재 열사는, 매 맞으며 일하는 버스 차장의 현실을 바꾸려면 자신이 좋은 버스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온갖 고생 끝에 버스 기사가 되었지만, 마주한 현실은 식사 시간은커녕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중노동에 시달리다 작은 사고라도 나면 쫓겨나는 버스 노동자였습니다.
박영재 열사는 회사와 손잡은 어용노조를 바꿔보려 2005년에 수원 민주버스노동자회를 결성하였고, 2011년에는 경기 민주버스노동자회를 결성하는 등 투쟁을 주도하면서 노동자 민중에게 진보정당만이 유일한 동지이고 진보 집권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방에 가입원서를 가지고 다니며 늘 당원 가입을 권유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한 노력 끝에 새롭게 창당한 통합진보당이 2012년 총선에서 13석 당선이라는 큰 성과를 이루자, 기득권 양당과 분열 세력은 무섭게 성장한 통합진보당을 괴멸시키려 광분하였습니다. 이들에 맞서 당을 지키려 투쟁하던 박영재 열사는 '당원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규명’, ‘유시민/심상정 통합의 정신으로 돌아오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2012년 5월 14일 스스로 몸을 불태웠고, 39일 만인 6월 22일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평생 가난과 차별 속에 스스로 노동자임을 깨닫고 그 처지와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나선 참 노동자, 노동자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진보 집권 운동에 나선 진실한 당원 박영재 열사의 삶은 진보 집권이 노동자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노동자
문송면(1971~1988, 17)
문송면(1971~1988, 17)
"살고 싶어, 병 다 나으면 무서운 서울 떠나 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
1987년 문송면은 야간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서울 영등포의 협성계공에 입사해서 하루 11시간씩 온도계의 수은 주입 작업을 했습니다. 온도계를 빨대처럼 입으로 빨아서 수은을 채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작업장의 공기는 수은 증기로 온통 뿌옇고 바닥에도 액체가 된 수은이 널려 있는 지경이었지만, 노동부는 개선명령 외에 별다른 실질 조치가 없었습니다. 입사 직후부터 불면증, 두통, 허리와 다리 통증 등의 증세가 나타났으나 적절한 치료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했고, 불과 2개월 만에 수은중독증상을 보여 휴직계를 제출하고 집으로 내려와 요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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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벗 ‘늦봄’
문익환(1918~1994, 76세)
겨레의 벗 ‘늦봄’
문익환(1918~1994, 76세)
“통일은 됐어”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며 윤동주, 장준하와 절친한 사이였고, 공동번역성서에 참여하는 등 기독교의 권위자였던 문익환 목사는 1975년 박정희 독재에 맞서던 절친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더욱 사회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 3월에는 박정희 퇴진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국가 전복 선동 혐의로 투옥되었고, 1980년 5월 내란 예비음모죄로 처벌받는 등 여러 차례 구속과 처벌을 감수하며 한국 사회운동의 어르신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의 힘으로 군사독재정권 체제가 종식된 이후에는 평화 통일운동에 투신해서 활동하였고, 1989년 에는 정권의 방해를 뚫고 방북하여 평화 통일방안을 논의함으로써 통일운동의 주역은 외세와 기득권이 아니라 민중이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던 문익환 목사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 운동을 제창하는 등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 활동을 하던 중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인해 영면하였다. '통일은 됐어'라는 말과 함께 치열한 통일운동에 투신하고, 반독재 투쟁을 이끌던 문익환 목사에게는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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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민족민주열사
1945년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과제는 민중이 잘 사는 자주독립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식민 잔재 청산이 무산되고 분단이 굳어지면서 정권은 민중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기득권세력은 ‘반공’과 ‘경제성장’의 논리 속에 노동자 민중을 가두는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방적인 희생 강요에 맞선 수많은 이들의 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많은 발전을 이뤄왔습니다만, 근본적인 전환이 아니라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그침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삶은 더욱 열악해지고 헬조선이라는 오명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분단과 불평등을 강요하는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백 년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중심 과제가 되었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백 년을 만들어 가는 그 길에 민족민주열사들은 우리 삶은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끝.
일방적인 희생 강요에 맞선 수많은 이들의 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많은 발전을 이뤄왔습니다만, 근본적인 전환이 아니라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그침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삶은 더욱 열악해지고 헬조선이라는 오명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분단과 불평등을 강요하는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백 년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중심 과제가 되었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백 년을 만들어 가는 그 길에 민족민주열사들은 우리 삶은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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