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민중항쟁,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 4.3 항쟁 (1/2)
4.3 항쟁 정신에는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주도민은 독립이 되었는데도 친일파가 친미파로 둔갑해서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미군 치하에서 진행하는 '분단국가' 건설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3만여 명의 도민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4.3 사건 또는 4.3 항쟁입니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수십 년간 ‘금기어’로 숨겨져 있었지만, 우리 노동자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 4.3 항쟁 (1/2)
4.3 항쟁 정신에는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주도민은 독립이 되었는데도 친일파가 친미파로 둔갑해서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미군 치하에서 진행하는 '분단국가' 건설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3만여 명의 도민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4.3 사건 또는 4.3 항쟁입니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수십 년간 ‘금기어’로 숨겨져 있었지만, 우리 노동자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주 4.3은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입니다.“ 시 <아무런 이유 없이> 김경훈 시인
- 해방 후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제주도민 3만 명은 왜 죽어가야 했을까요?
흔들리는 섬 - 일본군 요새로 전락한 제주도
제주도는 일본 제국의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 였습니다.
일제는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곳곳에 비행장을 만들고 해안마다 굴을 파는 등 군사기지를 건설했습니다. 노예처럼 끌려가 맨손으로 군사시설을 짓다가 죽어가거나, 일제 맞서 투쟁하다 죽어가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일제는 한반도에 배치된 전체 일본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대병력 7만5000여 명을 제주도에 배치하고 도민들을 이끌고 최후의 한 명까지 죽음으로 맞선다는 이른바 ‘옥쇄(玉碎)작전’을 추진했습니다. 그렇기에 제주도민에게 1945년에 해방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뜻했습니다.
해방정국 - 자치의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제주
일제의 폭압을 피해 육지나 일본 본토로 건너가서 생존을 유지하다 해방이 되고 제주도로 돌아온 사람들은 당연히 자주독립 국가에 대한 열망이 높았습니다. 또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해방 후 민중들은 오랫동안 염원했던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사업을 본격 시작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 모든 지역에 순식간에 만들고, 마침내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건국 5원칙
하나,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해방 후 제주도민의 삶
제주도는 22만 명이던 인구가 일본으로 갔던 6만 명이 귀환하면서 크게 늘었습니다.
독립 국가 건설은 중단되고 친일관료들은 미 군정의 관료가 돼서 밀수와 사재기로 자산을 수탈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도민들의 분노는 점차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해방되니까 일제 때 노동자로 갔던 사람, 징병, 징용 갔던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품고 귀향했는데, 제주도에선 먹고살 길이 없었어. 4·3을 두고 남로당 어쩌구 하는데 그건 지엽적인 문제야. 문제는 해방되었지만, 친일파들은 그대로 있고, 대학을 다녔어도 취직도 안 되고, 경찰들 이 모리배 노릇을 하고 탄압하니까 거기에 반발한 거야.” -강순현(당시 27세, 오현중교사, 미 군정 관재처 불하과장 역임)
4.3 사건의 도화선 - 삼일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4.3항쟁의 도화선이라고 말합니다.
이날 북제주에서는 3만여 명이 모여 ‘제28주년 삼일절 기념 제주 도민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곳만이 아니라 제주 각 읍면에서 열렸고, 우도에서도 대회를 개최하는 등 그 수가 5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날 대회의 주요 구호는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친일파 처단” “부패 경찰 몰아내자” 등이었습니다.
집회에 참여한 행진 대오가 관덕정 부근을 지날 때쯤 미 군정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채여 다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고를 내고도 아무 조치 없이 자리를 떠나려는 경찰을 행해 주민들이 항의하는 가운데, 경찰 총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날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다수가 상처를 입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대부분 등 뒤로 총을 맞은 이들이었습니다.
https://youtu.be/aN5u20_34wg
- 다음 주에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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