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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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소설 - 소설 '아리랑' 줄거리 정리 및 역사성



# 제1부 「아, 한반도」(1~3권)

  감골댁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다가 병을 얻고 숨어 지낸 남편의 약값으로 김가에게 18원의 빚을 지게 된다. 그러나 남편은 결국 죽고 ,갚을 길 없는 빚 때문에 감골댁의 큰아들 방영근은 20원에 하와이 이민으로 팔려가게 된다. 같은 동학군 출신으로 친가족처럼 지내던 지삼출이 나머지 돈을 받아내려 하지만 결국 장칠문을 한 대 친 죄로 주재소로 끌려간다. 구속된 지삼출은 일본 헌병으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하고 조선인의 관가로 보내달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조선땅의 치안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리에 절망하고 새삼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를 한스러워하게 된다. 

  선택의 여지도 없게 된 지삼출은 징역살이 대신 철도 공사장의 일꾼으로 가게 된다. 경부선 철도 공사장에 끌려간 지삼출은, 일꾼들은 물론이고 공사장 주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온 부역자 및 노역자들의 부당한 노동력 착취에 분노하게 된다. 노역자 중 같은 동학군 출신을 만난 지삼출은 의기투합하게 되고, 철도공사를 빗댄 노랫말을 듣고 철도공사에 얽힌 일본의 의도를 깨닫는다. 조선으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김제만경평야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우체국 조직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다닌다.

  양반들 편에서, 동학군의 편에서 처세에 따라 살아나가는 기회주의자 백종두는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개항이 되면서 일어학원들이 문을 열자 백종두는 놀기 좋아하는 아들을 학원에 보내고자 안달을 한다. 장덕풍은 대륙회사에서 이민 모집인을 하는 아들이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하자 숨어있는 동학군을 찾으면 출세길이 열린다며 설득한다. 또한 같은 보부상 출신들을 정보원으로 심고 잔존동학군을 찾으려 혈안이 된다. 우체국장 하야가와는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사주고 노점상 노인의 엿을 사주는 등 유순하게 생긴 생김새에 조선말을 하는 장점을 살려 호감을 얻는데 성공한다. 흘러가는 대화에서 조선의 정보들을 캐내는 한편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에게 한일조약에 대비한 준비를 당부받고 자신의 조직원들을 점검한다.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난 120명은 갖은 고생 끝에 하와이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갖은 욕설과 심한 채찍질, 인간 이하의 대접과 노예생활이었다. 열대성 잡초가 뒤엉킨 농지를 개간하는 일부터 시작한 사람들은 책임량을 채우기 위해 7월 열대 햇빛에서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게 된다. 일주일 중 하루 쉬는 날인 일요일도 감독들의 감시 아래 빨래와 목욕을 하러 가고 먼저 이민 온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자신들도 모르는 빚을 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민자들은 분노하나 해결방안이 없음에 한숨만 지을 뿐이다.

  일본 대농장의 상무인 모리야마는 총지배인 요시다와 김제 만경 들판을 둘러본다. 김제만경평야의 드넒음에 감탄하면서 닥치는 대로 논을 사라고 주문한 뒤 논을 팔지 말라고 선동하는 사람은 주재소의 도움을 받아 처리하라 명령한다. 개항 전에는 일본인에게 냉혹하게 대했던 이완용은 친일파로 돌아서고, 그가 자신의 논을 일본에게 팔았다는 소문이 농민들에게 불어닥친다. 그 소문에 편승해 일본은 갯논을 시가의 3배를 주고 사들이고 갯논에 농사짓기가 힘들던 갯논 소유자들은 앞다투어 논을 팔아버린다.

  호남평야의 가마솥 더위가 꺽이듯 계절의 변화와 함께 일본은 조선에 고문정치를 하게 된다.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는 우체국 소장 하야가와와 의논을 한 뒤 백종두를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회장으로 선출한다. 일진회 회장자리를 맡는 것에 흔쾌히 승낙했던 백종두였지만 밤에는 미처 생각 못했던 관리라는 입장에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그렇게 원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얻지 못하던 일급지 땅문서를 받고 바로 마음을 돌린다. 한편 장덕풍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대륙회사에 남으려는 아들을 설득해 일진회에 가입시킨다. 얼마 후 건달 수십명과 백종두가 단발을 하고 군산지부 일진회의 발단식을 가진다.

  큰아들 방영근이 없는 자리를 더 크게 느끼는 감골댁은 곧 다가올 겨우살이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큰아들이 없는 현재로선 품삯으로 버는 돈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네 김참봉이 매파를 보내 큰 딸 보름이를 첩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감골댁은 "새끼 팔아 배 채우는 부모 봤고 언니 누님 팔아 호식허는 동상덜 니 어디서 봤냐"며 마음이 약해진 보름이에게 절대 불가함을 당부한다. 송수익이 일제의 강압으로 사랑채에 세웠던 학교를 닫자 학교에 재미를 붙이며 다니던 대근이는 어머니를 조른다. 하지만 형편상 학교를 보낼 수 없는 감골댁은 마음이 무겁고 지삼출의 아내 무주댁에게 보름이의 혼처를 알아 볼 것을 부탁한다.

  한때 마음이 통했던 글벗 정재규를 찾아온 송수익은 세월이 흐름과 함께 생각이 변해버린 그에게 실망한다. 만석꾼 집안의 큰아들인 그와 손잡고 학교를 세워보고 싶었으나 정재규는 세상의 흔한 양반처럼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답답해진 송수익은 주막에 들르고 거기서 논을 팔라고 회유하는 일본 앞잡이에게 호통을 치고 쫓아보낸다. 이 일로 주재소에 끌려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중의 힘으로 다시 풀려나게 된다. 한편 지삼출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고 마을 주민들과 회포를 풀던 중 일진회얘기를 듣게 된다.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지삼출은 송수익에게 자문을 구하고 일진회의 속뜻을 알게 되나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짐을 한탄할 뿐이다.

  밥을 짓지 못하면서도 설거지 소리를 내고 연기를 내는 것은 체면치레 뿐 아니라 같은 처지일 게 뻔한 이웃에 대한 배려였다. 늘 그렇듯 솥뚜껑 소리를 내던 보름이는 펑펑 내리는 눈을 부질없이 바라보며 물 한사발로 저녁을 대신한다. 지삼출은 마을 주민들과 참새몰이에 나선다. 금산사 미륵불이 통곡했다는 소문을 들은 지삼출에겐 대나무 숲의 바람소리도 동학군의 혼이 통곡한다고 느껴진다. 요시다는 기한날짜에 자리를 비워 정재규의 담보물인 논을 떼먹고 그의 고용인 이동만 역시 뇌물을 받으며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군산엔 온갖 소비상품을 실어오고 쌀을 실어가는 배들로 북적거렸다. 광목, 석유, 성냥, 남포등, 잡화 등은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의 과시욕으로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갔고 반대로 조선의 쌀은 계속해서 실려 나가기만 한다. 잡화상 주인 장덕풍은 백종두에게 쌀을 팔아 오래 쌓아두어도 손해가 없을 석유를 사두라고 알려준다. 화폐조례에 따라 모든 돈이 일본돈으로 바뀐다는 걸 먼저 입수한 그였기 때문에, 백종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한편 일진회원들은 일본의 사주를 받고 전주 부민들과 싸우게 되나 열세를 면치 못하고 쓰지무라는 싸움 자체에 의미를 두며 흡족해 한다. 백종두는 아들이 꾀를 부리며 일어학원을 다니지 않자 경성으로 강제 입학시키며 쓰지무라의 소개로 하시모토를 만나게 된다.

  군산 포구에 도착하는 일인들만큼이나 금산사 미륵불과 은진미륵이 통곡을 했다는 흉흉한 소문은 계속해서 퍼져나간다. 결국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쓰는 등 민심이 흉흉해 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송수익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옛 글벗 신세호에게서 소개받고 의병을 도모하게 된다. 하야가와는 보호조약과 관련하여 의병 가담자가 생겨난다며 의병가담자들을 색출해 내라 명령한다.

  방영근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왔던 주만상은 심한 노동에 시달리는데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결국 눈을 감는다. 남은 사람들은 그를 조선식으로 장례지내고 싶어하나 농장 루나(감독)들의 제지를 받게 된다. 결국 의사의 통제로 조선식의 장례를 치르고, 누군가가 시작한 아리랑 노래를 따라 눈물겹고 한스럽게 부르며 가락을 이끌어 간다.

  들녘의 봄기운이 아련하게 어렸다. 그 아련함은 땅에서 하늘까지 자욱했다. 보호조약 체결과 함께 우국의 자결이 태풍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서 세상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침묵은 보호조약의 시인이 아니었고 조약체결 사실의 망각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건 항쟁을 위한 준비의 침묵일 뿐이었다. 충청도 의병을 시작으로 경상도에서도 계속해서 의병은 봉기하고 나선다. 전라도에서도 최익현과 임병찬이 의병준비를 하고 송수익과 임병서는 앞으로의 의병활동 방법에 대해 의논하고 헤어진다. 쓰지무라는 백종두와 일진회원들을 다그쳐 의병들을 탐지하라 지시하고 백종두와 장칠문은 몸이 달아 일진회원들을 마을로 내보낸다. 그러나 의병의 흔적을 찾던 일진회원들은 지삼출의 꾀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지삼출과 손판석은 총을 탈취한다.

  호남평야의 중간지점인 태인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백종두와 장덕풍은 쓰지무라와 하야가와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는다. 쓰지무라는 백종두에게 하야가와는 장덕풍에게 의병색출을 못한다고 호통을 친다. 의병을 없애려는 병력부터가 여럿이었고 그들은 의병뿐 아니라 의병에 가담한 가족에게까지 해코지를 한다. 지삼출의 아내는 구타를 당하고 송수익의 어머니와 아내는 주재소로 끌려간다. 송수익네 부대는 일본토벌군에게 계속 쫓겨다니고 생포된 의병들은 각기 자기 마을로 끌려간다.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마을 사람들은 의병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그들을 장례지낸다.

  이민법의 시행으로 일본이주민들은 늘어가고 이동만은 요시다의 지시에 따라 그들의 안내를 맡는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농민들이었다. 한편 신작로가 호남평야를 지난다는 정보를 얻은 하시모토는 당분간 무작위로 진행하던 농토 구입을 보류하고 염전사업을 할 계획을 세운다. 백종두는 염전사업을 도와주는 대신 군수자리를 부탁하게 된다. 신작로를 개설하기 위해 측량기사들이 논밭을 가리지 않고 깃발을 꽂고 다니자 크고 작게 논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정재규처럼 일부는 그들을 협박하여 쫓아내기도 하고 일부는 술을 사주며 뇌물을 먹이기도 한다.

  같은 양반출신으로 의병대장을 맡고 있던 송수익은 유기석과 생각이 틀렸다. 투항하라는 조정의 조칙은 일본 통감부에서 내린 것인데다 의병봉기는 전과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송수익에 반해 유기석은 전형적인 유생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송수익은 자신을 따르는 의병을 소조직으로 나누고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일본의 토벌작전은 더욱 거칠어지고 면마다 자위대가 생겨 의병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기만 한다. 그래서 의병대들은 필요할 경우에 협동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작전수행 중이던 공허와 만나 인사를 하게 된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용기간을 끝낸 방영근과 남용석은 풀려나지만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 삯은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뱃삯을 더 벌기 위해 하와이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마저 막히자 실망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하자 하와이 이민자들이 모금운동을 벌이지만 통역자로 모셔왔던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유로 얼마 후 떠나버리게 되고 실망과 원망의 대상이 된다.

  장인환 사건은 조선 내의 의병세력을 더 커지게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본을 공격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의병 대토벌작전에 들어가고 백남일은 이에 맞춰 모집하는 헌병 보조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생포된 손판석은 도로 공사장에 끌려가고 의병들은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에 거의 소멸된다. 유명한 용맹 장수들은 대토벌작전 앞에 쓰러져 가고 송수익도 싸움 도중 부상을 당해 암자로 숨게 된다. 의병의 기세가 꺾이는 것을 한스러워하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가 초대 통감 이등박문을 암살했다는 소식에 통쾌해 한다. 공허는 송수익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송수익 집을 찾아가서는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한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로 한성에서 열린 일진회 비상임시총회에 박수부대로 참석한 백종두는 잠시 양심에 꺼리나 곧 떨쳐버린다. 한편 어느 정도 상처를 회복한 송수익은 공허를 통해 말사라 부르는 자그마한 절에 피신한다.

  도로공사에 투입되었던 의병들은 앞날을 알 수 없는 옥살이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나날을 보낸다. 도로의 보수공사와 대대적인 식목공사에 동원되곤 했는데 일본 국화인 사쿠라를 심는 일은 손판석같이 의병출신인 사람들에겐 더 비감스런 노동이었다. 호남선 철도공사가 몇 년을 소문처럼 떠돌다가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군산과 일본의 호남선 싸움에서 갈등하던 통감부가 의외로 전주양반들의 반대가 나오자 해결방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총독부는 한일합방에 대한 저항을 줄이기 위해 일진회같은 친일 단체들을 포함하여 정치단체에 해산령을 내린다. 백종두는 일진회가 해산된 후 죽산면장으로 임용되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다는 얘기를 쓰지무라에게 듣는다.

  말사에 피신하고 있던 송수익은 공허의 안내로 온 신세호와 임병서를 만나게 된다. 몇 년만에 같이 자리한 이들은 처음 의병의 앞일에 대해 의논하다가 임금에 대한 생각차이에 부딪치게 된다. 송수익이 의병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상감과 조정의 망발이라고 하자 신세호는 평상시 성격과 달리 크게 화를 낸다. 그러나 송수익 역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반박하고 결국 나라의 주인을 누구로 보느냐의 차이라며 언쟁은 끝나게 된다. 임병서가 앞일에 대한 의논을 하자 제의하나 송수익의 북행에 대해 임병서와 신세호는 주저하게 된다. 결국 송수익은 신세호에게 신채호의 이야기책인 성웅이순신과 을지문덕을 읽으라 조언하고 신세호와 임병서는 산을 내려온다. 집에 돌아온 신세호는 그런 이야기책이 금서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책을 읽은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방법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

  한일합방은 멀리 떨어져있는 하와이의 조선사람들에게도 여파를 미쳤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대한국민회 하와이 지역 총회에서 일본성토와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영사관은 인구조사를 하고 다닌다. 국민회에서는 합방으로 낙망하여 방황하는 조선인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각 농장마다 젊은이를 모아 군사교육을 시키게 되어 방영근 등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더불어 농장주와 국민회 사이에 '사진 결혼'이 논의되어 결혼하러 오는 조선여자는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도록 하여, 나이든 총각들은 가슴 설레게 된다.

  무주로 시집갔던 보름이는 남편이 의병과 내통했다 하여 총살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나마 묘를 쓸 수 있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고 시아버지가 여름과 겨울에 친정나들이를 허락한 것을 위안삼는 그녀였다. 친정에 온 보름이는 가족들의 선물로 일본 광목과 수실을 사왔다가 대근이의 생각 곧은 소리를 듣게 된다. 대근이는 신세호가 무료로 여는 서당에 다니며 교육을 받으며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공사장에서 도망친 의병출신 동네 주민이 밤에 왔다 갔다는 소식을 접한 무주댁은 남편 지삼출을 찾아나서고 싶어한다. 그러나 올 때가 되면 식구를 데리러 올 것이라며 감골댁이 만류하자 무주댁은 고개를 끄덕인다.

  죽산면 면장이 된 백종두는 밑으로는 장칠문을 순사보로 두어 의병과 배일자들을 색출하려 혈안이 되는 한편 하시모토의 토지수매를 위해 힘을 쓴다. 하시모토는 토지조사사업 전에 죽산면의 농지경작 실태를 조사하라 지시한다. 끄나풀을 풀어 일본을 욕하는 사람들까지 찾으려 혈안이 된 장칠문은 순사들과 신세호를 주재소로 끌고 간다. 신세호는 신채호의 금서를 소유한 혐의로 신민회 간부로 지목받고 고문당한다. 신씨 문중은 신세호를 풀려나게 하기 위해 백종두를 찾아가 사정하게 되고 백종두는 양반에게 존대를 받았다고 통쾌해 한다.

  말사에서 송수익을 본 뒤로 송수익을 그리워하게 된 홍씨는 죽은 남편의 삼칠제를 올리겠다고 시부모께 핑계 대고 말사를 찾는다. 동승 운봉이 홍씨의 마음을 공허에게 전하며 송수익을 만나게 해 주기를 부탁한다. 공허로부터 홍씨의 일을 전해들은 송수익은 홍씨에게 자기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다며, 만난 일이 없었던 것으로 잊으라며 자리를 뜬다. 송수익은 만주행을 위해 의병을 해산시키고 아리랑 노래를 주고받으며 작별한다. 아리랑을 부르는 그들의 가락은 서럽고 구성지면서도 컬컬하고 어기차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일본 대농장의 지배인 요시다의 앞잡이를 하는 이동만은 요시다를 등에 엎고 부를 축적한다. 일본인 농민들로 인해 소작을 떼인 조선사람들에게 냉혹하게 대하고 돈놀이를 하며 고리를 받아 챙긴다. 송수익과 헤어져 후일을 기약한 의병들은 화전을 일구고 집을 지어 천수동, 배두성, 손씨 등이 거주토록 하고, 지삼출과 손판석은 하산하여 군산으로 향한다. 군산은 타관사람들이 많아 숨어 살기 알맞았기 때문에 군산부두에서 등짐일을 하게 된다. 소작인들의 원망이 높았던 이동만은 한밤중에 소작인들에게 피습 당해 다리가 부러진다. 소작인들은 차례로 농장 사무실에 끌려가 헌병들로부터 매타작을 당하나 범인이 잡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호남선 중에서 군산-강경선이 제일 먼저 개통되고 군산역은 일본사람들로 붐빈다. 송수익을 만주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공허스님은 포교당에서 지삼출과 손판석을 만나 후일을 도모한다. 김참봉과 하시모토의 마수에서 막내딸 수국이를 지키려고 애가 타던 감골댁은 가족들을 데리러 온 지삼출과 손판석을 따라 군산으로 피신한다. 장덕풍은 작은 아들을 사탕공장 기술을 배우게 해서 사탕공장을 세우면서도 정미소를 차릴 욕심을 부린다. 그의 큰아들 장칠문은 공을 세우고 정식 순사가 되어 군산으로 옮기게 된다. 정재규는 아버지가 죽고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화투와 주색잡기에 빠져든다. 장덕풍은 그런 정재규에게 급전을 빌려 주고 하야가와의 장학후원회 가입 권유에 흔쾌히 응하며 유지대접 받음을 흐뭇해한다. 정재규 일가는 아버지가 죽은 후로 2년 넘게 재산 다툼을 벌이고 그로 인해 어머니는 병을 얻게 된다.

  문중의 힘으로 주재소에서 풀려나온 신세호는 심호흡 치료로 몸을 회복해 간다. 몸은 거의 회복이 되어갔지만 송수익의 모친 병문안을 가는 신세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송수익의 모친은 그간의 고생과 고통이 그대로 병이 되어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문병을 가는 임병서가 찾아와 독립의군부에 가담할 것을 제의하지만 그와 같은 운동은 문약한 유생들이 하는 꿈같은 일이라며 거절한다. 그리고 손수 농사를 짓고 서당을 다시 열리라 결심한다. 결국 송수익의 모친은 사망하고 빈소를 찾은 공허는 순사에게 잡히지만 중간 논길에서 순사와 순사보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통감부에서는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궁장토, 역토, 둔토 등 많은 토지들을 국유화시킨다. 그러나 실제 모두 나라의 것이 아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사유지화된 것이 많았으나 일본은 그런 모든 사유를 무시했다. 그렇게 국유화된 농토의 7할 이상을 통감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준다. 뒤늦게 땅을 되찾고자 일어났으나 합방이 되어 버렸고 땅이 사유지라는 공문서가 없을 경우엔 그대로 뺏겨버리는 식이었다. 농토를 빼앗긴 외리와 내촌 사람들은 외리마을 박병진과 내촌마을 김춘배를 대표로 동척을 찾아가 항의하지만 대표자 둘은 구속되고 나머지는 심하게 태형을 당하고 일부 불구자가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하시모토는 지주 대표를 뽑는 일에 자기편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하라 지시하고 백종두는 그런 하시모토가 못마땅하다. 땅욕심이 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하시모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땅을 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미소를 세우기 위해 기계를 사들이고 죽산면이 아닌 다른 면에 땅을 사기 시작한다.

  송수익의 모친문상을 갔다가 순사와 순사보를 죽인 공허스님은 피해다니기 위해 농부로 가장한다. 가장한 채 숨어있는 의병들을 점검하던 공허는 배두성이 천수동, 손필녀 등이 있는 화전민촌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간다. 장날 토지조사사업에 반대하는 언급을 했다가 주재소에 잡혀갈 뻔하여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하며 얼떨결에 필녀와 배두성을 중매놓게 된다.

  지삼출을 위시해 손판석, 방대근 등은 군산부두에서 중국인들과 패싸움을 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싼 노임값으로 군산부두의 일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조선 일꾼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싸우던 중 손판석은 다리가 부러지고 방대근도 허리 부분을 다치게 된다. 방대근과 친구로 지내는 서무룡은 우연히 수국을 보게 되고 그 미모에 반하게 된다. 감골댁은 방대근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을 메꾸고자 미선소에서 일하길 희망하지만 나이 때문에 결국 허락을 받지 못하고 수국이가 무주댁과 정미소 일을 나간다.

  아버지를 면회하고 온 박건식은 재판날짜조차 모르는 신세가 한탄스럽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거짓말로 안심시키고 마을 주민들과 회의하며 땅을 포기하지 않음을 다짐한다. 타작때가 되자 동척은 타작의 절반을 걷어간다. 그것도 모자라 숨겨논 볏단이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집을 뒤지고 다닌다. 절반을 빼앗긴 억울한 마음에 볏단을 숨겼던 한기팔은 동척 직원들에게 기절할 정도로 몰매를 맞는다. 섬 대신 일본에서 들어온 가마니 값과 동척 직원들의 밥까지 해 날라야 했지만 그나마 남은 볏단을 뺏기지 않기 위해 억울함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우체국장 하야가와의 추천과 도움으로 일본의 첩보원 학교를 졸업하게 된 양치성은 돌아와 가족들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아버지가 죽고 그의 가족은 가난함에 허덕였고 맏아들인 그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머슴으로도 들어가지 못하자 한푼 줍쇼라는 말을 일본어로 배워 동냥질을 하게 된다. 그러다 하야가와의 눈에 띄었고 그의 밑에서 우체국 소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하야가와의 도움으로 첩보원 교육을 마친 양치성은 조선에 돌아왔고 노동조합의 실태를 파악하는 첫 임무를 맡는다.

  방대근이 부두에서 중국인들과 싸우고 몸을 다쳐 일을 못 가자 수국이는 손판석의 아내 부안댁과 미선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일을 끝내고 나갈 때마다 몸수색을 당하는 것에 몸서리를 치는 수국이는 어서 동생이 낫기만을 바란다. 그러다 미선소 주인의 아들 백남일의 눈에 띈 수국은 속임수로 끌려간 후 강간당한다. 방대근은 복수하기 위해 백남일을 미행하고 지삼출과 함께 그를 폭행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화전민촌으로 피신한다.

  지삼출을 의병잔당으로 의심하고 있던 양치성은 한 발 늦었음을 알고 분통해 한다. 그리고 하야가와에게 원인이 백남일이라고 보고하고 백남일을 헌병에서 쫓겨나게 한다. 그리고 서무룡을 방대근과 공범이라고 몰아 자신의 정보원으로 삼는데 성공한다. 백종두는 그의 아들 백남일이 강간한 사람이 수국이란 사실을 알고 하시모토를 생각하며 가슴이 서늘해진다. 한편 화전민촌으로 피신한 수국이는 자살을 기도하나 지삼출 등에 일찍이 발견되어 살아난다. 그리고 공허스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을 돌려 만주로 떠날 결심을 한다.



# 제2부 「민족혼」(4~6권)

  박건식은 아버지가 5년형을 받고 징역살이를 하는 이유로 풍악놀이의 징채 잡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같은 마을의 남상명은 왜놈들이 악독할수록 더욱 힘을 내어 풍악을 울려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며 박건식의 부친께서도 그리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마음을 굳힌 박건식은 풍악놀이를 나서지만 농악대 앞에 나타난 순사는 농악을 금지한다며 북과 장구를 칼로 찔러 버리고 가 버린다. 백종두는 토지조사 위원회를 구성할 지주대표를 구성하면서 자기편을 뽑기 위해 고심한다. 지주총대는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해 나갈 선봉대였던 것이다. 지주총대의 서명이 없는 것과 기한내에 제출되지 않는 땅은 무조건 국유로 편입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백종두와 이동만은 갖가지 편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대지주들은 면사무소를 들락거리며 자기네 재산을 지킬 수 있게 수를 쓰지만 약간의 논밭을 가진 일반 소지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가면서 신세호는 결국 동네 사람들의 신고서를 작성해 준다. 권력을 믿고 만행을 저지르던 지주총대들이 각지에서 폭행을 당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와중에 살인도 일어나게 된다. 차갑수는 얼떨결에 지주총대를 떠밀고 당산나무 아래에서 총살당한다.

  만주로 온 송수익은 부하들이 오기 전에 최적의 투쟁지를 물색하려 중국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일본군과 싸우기에 여건과 입지조건이 좋고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통화로 기지를 정한다. 지삼출과 천수동, 김판술, 배두성등 같이 의병으로 활동했던 부하들이 건너오자 송수익은 매일 밤 그들을 모아놓고 교양교육과 정신무장을 시켜 독립군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신을 위하여 모든 부하들의 상투를 직접 잘라준다. 이회영 등이 사비를 들여 설립한 신흥강습소를 둘러보고 오는 송수익은 놀라는 한편 가슴벅차하며 조선의 젊은이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기 위해 자신도 힘을 보탤 것을 다짐한다.

  만주를 다녀온 공허는 신세호에게 송수익이 사돈 맺기를 원한다고 전하자 신세호는 이심전심이라며 기뻐하며 흔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독립의군부에서 활동하던 임병서가 만주로 피하길 원하다고 말하고 공허는 하루라도 빨리 임병서를 만나겠다고 한다. 그런 그의 신속함에 신세호는 송수익한테서 느끼는 결단력 있는 무인의 체취를 느끼게 된다. 신세호의 집을 나서는 공허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부자와 거상들을 털 비밀 결사 조직을 결심한다. 총독부는 사찰령을 내려 절들의 조직체계를 재정비하고 재산을 불려주어 승려들이 무상이란 도피처에 안주하게 만들었고, 그 전처럼 승려들은 의병으로 나서게 되질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의병은 뿌리가 뽑히고 양반지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느라 나라는 간 곳없이 친일파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군산으로 와 손판석을 만난 공허는 서무룡이 일본의 앞잡이일 가능성이 있으니 잘 살피라 조언하고 홍씨의 집에 들러 만주로 향하는 그녀의 마음을 달랜다.

  지주총대 나기조를 떠다밀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차갑수의 아내는 결국 실성하여 저수지에 빠져죽고 그의 아들 득보와 옥녀는 거지 생활로 연명한다. 누이동생을 굶기지 않기 위해 동냥을 하던 득보는 아이들이 놀릴 때면 왜놈들에 대한 분노를 삭히며 닷새에 한번은 부모님 산소에 갔다오곤 한다. 산소에서 내려오다 평소 소리에 소질이 있던 동생의 노래를 들은 주막집 주인의 눈에 띄어 주막에서 머물게 된다. 그러나 옥녀는 주막집 주모에 의해 놀이패에 넘겨지고 오누이는 헤어지게 된다.

  방대근에게 폭행당한 백남일은 일본까지 가서 치료를 받지만 결국 한 쪽 눈을 잃게 된다. 자연스럽게 헌병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애가 탄 백종두는 하시모토와 쓰지무라에게 선처를 부탁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장덕풍은 아들에게서 백종두의 얘기를 전해듣고 고소해 한다. 그동안 백종두의 출세와 재산 불림이 배가 아팠던 것이고 자신을 무시한다 하여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계속해서 순사를 하고 있었고 이제 정미소와 미선소를 세우면 재산도 부러울 게 없게 되는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그의 농장에서 생산된 쌀과 소금을 일본으로 보낼 때엔 꼭 군산부두에 나왔다. 본국으로 싣고 가는게 뿌듯한 반면 더 많은 양을 보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 부두에서 출항하는 배를 지켜보던 그는 이주민들이 부쩍 늘어나는 이유를 쓰지무라에게 묻게 되고 일본이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이주민의 목표를 2백만으로 잡았음을 알게된다. 더불어 그 이주민들의 생활을 위해 국유화된 토지를 우선 대여해주는 등의 혜택을 베푼다는 사실도 듣는다. 이렇게 이주해온 일본 농민들은 총독부에서 주는 땅에 집을 짓고, 논을 뺏긴 외리의 한기팔은 분풀이로 일본인집 앞에 똥을 붓고 주재소에서 매를 맞는다. 박병진을 면회간 박건식과 남상명은 일본 이주민에게 우선순위로 땅을 주는 등 사정은 더욱 어렵게 변해가고 있음을 알려야 하기에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박병진은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땅을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당부한다.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정도규는 어머니 상을 당해 급하게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모친의 주검 앞에서 큰형인 정재규와 작은형인 정상규는 재산싸움만 하고 상주로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 장례가 끝나고 정재규는 자기 몫의 재산에서 반을 내어놓고 형들을 설득하여 재산분배를 끝낸다. 그러나 재산분배가 됨으로써 형들과의 마지막 끈이 끊어진 것 같아 씁쓸하다. 꺼림직 했던 재산분배를 해결하고 홀가분해진 정재규는 나락을 처분하지만 현금으로 받은 돈을 그날밤으로 공허의 비밀결사대에게 강탈당한다.

  세상은 뒤숭숭해지고 일본 헌병과 순사들의 기세는 갈수록 등등해 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헌병들 몰래 장수탄생가를 불러댔고 어른들은 부잣집만 털어가는 떼도적 얘기를 하면서 그들이 의병하던 사람들일거라 추측하며 뿌듯해한다. 신세호는 떼도둑 소문을 들으면서 그들이 공허가 이끄는 비밀결사대라 믿으며 무사하길 빈다. 공허는 손판석에게서 하시모토가 5천석을 처분했다는 얘길 듣고 하시모토의 집을 털지만 매복하고 있던 순사들에게 공격당해 도망간다. 공허는 홍씨집으로 피신한 뒤 홍씨와 통정하게 되고 홍씨는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송수익을 떨쳐낸다.

  보름이 시아버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밭을 뺏기게 되자 측량하는 면서기를 괭이로 찌르고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한다. 시아버지만을 믿고 살던 보름이는 어린 아들 삼봉이와 단둘이 남게 된다. 결국 아들과 먹기 살기 위해 산을 내려온 보름이는 군산의 손판석을 찾아가고 그가 관리하는 창고의 낙미쓸이로 일하게 된다.

  하와이에 이민간 방영근은 10년 세월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다. 그 사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파인애플 농장으로 옮긴 그는 다른 조선노동자들이 그렇듯 처음보다 나아진 환경에서 일하게 된다. 조선노동자들은 다른 나라 노동자들보다 부지런하면서 일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나은 대접을 받아 독방을 쓰기도 했다. 오로지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하던 조선노동자들은 계약이 끝나도 돌아갈 뱃삯이 없어서 계속 일해야 했고 그사이에 사진결혼으로 온 조선처녀들에게서 고향의 수탈소식을 듣고 의욕을 상실하기도 하고 더욱더 많은 성금을 국민회에 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 그들은 10년동안 고향에 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하와이에 도착해서부터 방대근의 친한 동료였던 남용석은 사진결혼으로 왔다가 도망친 김말녀를 구해주고 결혼식을 한다.

  만주로 온 조선인들은 강가의 습지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짓는다. 밭농사밖에 할 줄 모르는 중국사람들이 '메기'라고 부를 정도로 조선인들은 한사코 강가에서 농사짓기를 고집했고 보잘것없는 소출이나마 논농사를 이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농토로 일구어 놓으면 중국인 지주들이 나타나 소작료를 요구했고 개간해준 공로를 인정해 소작료를 낮춰보고자 하지만 소용이 없다. 만주땅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은 이런 사실을 알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어 사람들은 비감에 젖는다. 또한 부민단은 동네단위로 무장 자치대를 설치하고 밀정등이 숨어들어오면 서로 연락해 처치하기도 한다.

  쓰지무라는 새로 발령받은 주재소장에게 조신인의 끈질긴 근성을 방심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하시모토는 말을 돌려 가며 백종두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백종두는 쓰지무라 과장의 이름을 팔아 면민들의 쌀을 독점하고, 항의하는 부자 양반들에게도 쓰지무라의 이름을 팔아 협박을 한다고 모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백종두가 하시모토에게 알리지 않고 죽산면장의 권한으로 몰래 토지를 매입했기 때문에 하시모토가 꾸민 일이다.

  동척에 항의하다 태형을 심하게 당한 외리의 김용철은 집나간 아내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결국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아래에서 죽게 되고 같은 동네 사람들은 곡식을 추려 장사를 지내준다. 한편 득보는 거지 행각을 하고 어릴 때 헤어진 동생 옥녀를 찾아 각지를 떠돌아다닌다. 박병진은 결국 감옥에서 옥사하고 외리의 주민들은 박병진의 아들 박건식을 땅찾기 운동의 대표자로 선정한다.

  양치성에게 약점을 잡힌 서무룡은 그 후 부두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하고 다닌다. 점점 친일로 기울면서 건달이 되어 가던 서무룡은 수국이를 닮은 보름이를 보게 되고 보름이의 환심을 사려 노력한다. 미선소 일을 끝내고 가는 보름이를 본 장칠문까지 보름이 주위를 맴돌자 보름이는 위협을 느끼지만 아들의 장래를 위해 참고 견딘다. 손판석이 뒤를 봐주고 낙미쓸이를 하면서 쌀을 조금씩 훔쳐내던 보름이는 장칠문에게 들키게 되고 그를 빌미로 잡은 장칠문의 첩이 된다. 화가 난 장칠문의 아내에게 폭행을 당한 보름이는 유산하고 병원에서 퇴원하다가 경찰서 계장 세끼야의 눈에 띄고 그의 첩으로 넘겨지게 된다. 보름이를 좋아하던 서무룡은 장칠문을 죽이려 하나 기회를 잡지 못한다.

  삽괭이를 들고 새벽에 나서는 신세호는 손수 농사를 짓게 되면서 느껴지는 자연의 경이감에 감탄한다. 그러나 곧바로 야유조로 시비를 거는 양치성을 만나게 된다. 양치성은 송수익과 사돈을 맺으려 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혼약을 하게 되면 힘들어질 거라고 협박을 하고 떠난다. 송수익의 생존사실이 알려질까봐 불안해진 신세호는 급한 마음에 전주고보까지 걸어가고 사위될 송중원을 찾는다. 그리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다짐시킨다.

  공허는 만주의 송수익에게 군자금을 전달하러 기차를 탄다. 잠시 정차한 평양역에서 내린 공허는 게시판에 걸린 의병대장 채응언의 방을 보고 그의 용맹함에 존경을 표한다. 기차와 마차를 갈아타면서 만주로 향하던 공허는 마차에서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분개한다. 그들은 만주의 마적떼속에 조선인이 끼어 있다고 단정지었으며 그 얘기야말로 왜놈들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퍼트리는 악의적 소문이었던 것이다. 통화로 가는 마차에서 대종교도 한법린을 만나게 된 공허는 그의 친절함에 옷을 구해 입게 되고 '우리 한 몸, 한 몸이 다 조선입니다. 몸 보존 잘하십시오'라는 말에 대종교에 관심이 끌리게 됨을 느낀다.

  하와이의 매음가에도 조선 여자들이 서넛 있었다. 사진결혼으로 하와이에 왔다가 남편과 뜻이 맞지 않아 도망을 친 여자들이었다. 방영근은 그런 그녀들이 못마땅했지만 속사정을 듣고는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남용석은 사진결혼에 속았다며 뛰쳐나온 말녀를 우연히 구해주고 아내를 삼지만 결국 이혼하게 된다. 말녀는 이승만이 하는 학교에서 봉사한다며 가정도 돌보지 않고 남편을 항상 무시하곤 했다. 국민회의 박용만과 외교점진론자인 이승만의 의견충돌처럼 남용석과 말녀는 지지하는 사람도 틀렸고 생각하는 방법도 틀렸던 것이다.

  면장직을 면직당한 백종두는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비웃는 눈초리 때문이다. 고민하던 백종두는 아들의 말을 듣고 바로 호남친화회를 발족하고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가 살아난다. 백종두가 면직당하자 마자 그를 외면한 장덕풍은 당황하게 된다. 이동만은 경성에서 열리는 조선물산공지회를 관람하기 위해 농감들로부터 요시다의 경성나들이 비용을 뜯어낸다. 물론 자신 역시 경성에 가며 요시다와 따로 간다는 언질을 잊지 않는다. 정재규는 동생 정상규에게 경성의 조선물산공진회에 같이 구경가자고 제의하지만 정상규는 만석꾼의 꿈을 이루기 전에는 헛돈 안 쓴다며 거절한다. 그 구실로 틈이 벌어진 형제애를 회복해 보려던 정재규는 아쉬워하고 결국 혼자 경성으로 향한다. 경성에서 유학 중이던 정도규는 물산공진회에 조선인들이 북적거림을 보고 추태라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 보내기 위해 고무신을 사게 된다. 그 고무신이 조선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던 그는 일본의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상술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물산공진회가 끝나자 한반도의 곳곳에서는 고무신 바람이 불게 된다. 고무신은 고운 모양새뿐 아니라 발도 편해서 짚신과 많은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무신을 보고 탐이 난 장덕풍은 도매상 독점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무신 회사를 찾아가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공허는 김제포교당 도림스님에게 신한독립사의 필사를 부탁하고 각 서당의 젊은 선생들을 만나 한국통사를 전한다. 도처에 생겨나고 있는 신식 서당에서는 한글은 물론이고 산술과 역사까지 가르치고 있었고 공허는 그들을 돌며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다닌다. 마지막으로 죽절리의 홍씨집에 들른 그는 홍씨가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방대근이 신흥 무관학교를 졸업하는 날 감골댁은 물론이고 수국이도 기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막내아들이 군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더없이 자랑스럽지만 왜놈들과 직접적으로 싸워야한다는 생각에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졸업식날 감골댁을 필두로 수국이와 송수익, 지삼출, 배두성, 필녀 등이 뒤따랐다. 졸업식장에 참석한 송수익은 졸업생 윤주협, 노병갑, 김시국, 권혁도 등을 소개받고 그들에게 공화주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방대근에게 졸업선물로 '백호'의 필서를 선물한다.

  일본은 비탈밭과 빈터에 뽕나무 심기를 강요하고 나선다. 그러나 강제로 심게 하면서도 그 묘목은 공짜가 아니었고 조선농민들은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기만 한다. 뽕나무의 증가로 견사공장도 늘어나고 공장들은 조선처녀들을 모집한 뒤 공장에 반강제로 가둬놓고 노동력을 착취한다. 박건식, 남상명 등은 동척에 빼앗겼던 논이 하시모토에게 넘어가게 되자 소작까지 떼이게 된다. 하시모토를 찾아가 소작권을 주장하려던 그들은 사나운 개들에게 물리기만 한다. 한편 신세호네 동네에서는 소작마저 떼이고 살 길이 없어진 네 가구가 만주로 향하게 된다. 그들을 배웅나온 신세호는 네 사람의 가장에게 당산나무 아래 흙을 한 주먹씩 건네고 무언이지만 고향을 잊지 말 것을 다짐한다.

  헤어진 동생을 찾아헤매던 차득보는 장흥에서 한 늙은 거지를 만나게 된다. 늙은 거지는 장타령 부르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장타령은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있는 아프고 쓰리면서 말로 못하는 사연들을 담아야 듣는 이의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린다고 한다. 전주고보에 재학중인 송중원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창가보급회에 가담하며, 조회시간에 일본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육 주임에게 호되게 맞는다. 고보 1년 선배인 이광민이 일본에 유학가기로 정했다며 송중원에게도 유학을 권유한다.

  양치성은 총독부에서 정신 재무장을 위한 교육을 받고 첩보원으로 배치 받는다. 총독부의 강사는 조선인이 수전 민족의 특징을 고루 갖추었으며 그들은 끈질기고 영리하다며 조선인의 끈질김에 유념하고 주시해야 된다며 강조한다. 한편 서무룡은 일본 헌병대의 묵인아래 폭력조직을 구성하여 그들의 보호 아래 친일 행각을 하게 된다. 정신 재무장 교육을 받은 양치성은 압록강변의 일본군 나남수비대에 배속된다. 그리고 등짐장사로 가장하고 만주에 침투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색출에 나선다. 한편 송수익은 통화현 대종교 교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주해오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새로 개척되는 지역을 소개시켜 정착토록 한다. 일본은 간교한 술책을 부려 중국 관헌들과 함께 통화현 대종교 간부교도를 체포하려 한다. 소식을 접한 송수익은 책임자 한법린과 함께 무송현으로 피해 그곳 무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훈련을 가르친다.

  폭력배 두목이 된 서무룡은 그가 좋아했던 방수국을 강간한 뒤 명씨박이눈이 된 백남일에게 분풀이를 하며 세끼야가 출근하고 없는 틈을 타 보름이 집을 찾아 그녀의 몸을 뺏곤 한다. 정재규는 대한광복단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으라는 포고문을 받고 경찰서에 신고하지만 경찰 대신 서무룡의 건달패들을 배치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경호는 신경쓰지 않고 침모의 딸을 겁탈하는 등 행패만 부리며 돈도 뜯어낸다. 대한광복단은 군자금 조달을 위해 지주들에게 통고문을 띄우는 공개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허는 조달방법의 실효를 믿지 않아 그 조직에 가담하지 않았다.

  국내에서의 서당교육의 양적 확대와 질적 향상은 국외에서의 독립군양성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한 두가지 중대사업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서당규칙'을 공표하여 서당활동을 제한한다. 공허는 자신이 선을 대고있는 서당선생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그들을 바쁘게 만나고 다닌다. 그리고 먼저 신고서를 제출한 뒤 그 다음 방안을 찾아가자고 당부한다. 토지조사사업으로 하시모토는 죽산면의 반을 넘게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어있었다.

  정도규가 일본유학을 떠나려고 하자 그의 두 형은 재산을 대신 맡아준다 선심을 쓴다. 그러나 정도규는 살림을 아내에게 맡기고 그렇게 일을 꾸미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럽고 서글프다. 정도규는 서당 동문이었던 유승현집을 방문하나 그는 야학에서 금지 사항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주재소에 끌려가 있었다. 정도규는 주재소에서도 유승현을 면회하지 못하고 귀가하고, 귀가 중 조선아이들이 일본아이들에게 행패를 당하면서도 부모들이 소작을 떼일까봐 대항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등짐장수로 가장한 밀정 양치성은 통화현에 들어서면서 전라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곳에 도착한다. 전라도 김제 사람들이라는 말에 조금 망설이지만 마을에 대종교 교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갈 결심을 한다. 처음보는 얼굴인 탓에 양치성은 지삼출 등에게 수색을 당하지만 세심한 수색에도 불구하고 정체가 탄로나지 않게 된다. 신분을 확인당한 뒤 양치성은 주기적으로 마을에 찾아오고, 정보를 캐는 한편으로는 필녀를 앞세워 수국이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한다. 송수익은 방대근과 김시국 등을 데리고 연해주에서 총을 구입하기 위해 신한촌 한인 청년단 간부 윤철훈과 조강섭을 만난다. 한인 청년단은 소련의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단원대부분이 공산 당원이 된다. 윤철훈이 방대근 등 일행에게 한인 청년단 가입을 제의하자 방대근은 조직의 일원으로써 조직의 허락 없이는 가입이 어렵다고 대답하며 앞으로 협동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한다. 현명하게 대답하는 방대근을 바라보며 송수익은 마음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 동안의 만주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으며 만주땅에는 수많은 방대근을 키워냈음을 믿는다.

  독립지사 39인의 이름으로 범민족의 대표성을 확보한 최초의(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장면 1 : 상해 신한 청년단 모임. 여운형, 김구, 장덕수, 조동호, 신석우 등 독립운동가들이 선언서를 읽어보며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독립건의서를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장면 2 : 미국워싱톤 국무성 앞. 미국국무성이 한인대표로 인정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려는 정한경, 민찬호, 이승만 등의 출국을 불허한다. 미국의 속뜻을 의심하며 외교독립론에 회의를 제의하는 정한경과 민찬호와는 반대로 이승만은 미국은 조선의 편이며 미국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면 3 : 동경유학생 웅변 대회장. 동경 조선인 유학생 5백여명이 모여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다 경찰들에 줄줄이 잡혀간다.

장면 4 : 하와이 국민군단 훈련소. 방영근을 비롯하여 하와이에 이주해 온 조선남자들은 목총을 가지고 열심히 군사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의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음에 방황하며 토론하나 속뜻을 몰라 답답하긴 교관이나 훈련생들이나 마찬가지다.

장면 5 : 간다쿠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신년 유학생들은 모여 진지하게 회의를 한후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한다.

장면 6 : 중앙학교의 밤모임.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의 민족대표를 뽑고 선언서 작성 할 사람을 선정한다.

장면 7 : 전민족의 운동으로 확대 결정. 시기가 적절하다는 식자층의 지지로 최대의 참여와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참여범위를 확대하기로 한다.

장면 8 : 동경의 2․8 독립선언.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6백여명의 학생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장면 9 : 한국위임통치 청원사 발송.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조선의 위임통치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미국에 제출한다.

장면 10 : 모든 운동세력들의 대연합. 기독교, 불교, 천도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세력들이 연합하여 독립운동선언에 참가하기로 한다.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의 선창을 따라 긴 대열을 이룬 군중들이 계속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공허스님은 도림스님과 함께 대열에서 빠져나와 그 감격스런 장면을 보며 콧날 매운 감격과 가슴 뻐근함을 느낀다.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을 보고 기차를 탄 공허는 도림으로부터 건네 받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배포하기 위해 이리역에 내리고, 자신보다 먼저 서울소식이 와있음에 놀란다.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거사시일을 앞둔 공허는 군산에서의 만세운동소식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군산에서의 시위확산을 위해 신세호를 만난 공허는 이미 신세호가 독립선언서를 읽어봤음을 듣고 군산의 시위와 학생조직이 직결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곧 전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날 것을 직감한다. 이틀 뒤 전주에 이어 이리, 강경에서 만세열풍이 일어났다. 그런데 학생이 주도하지 않은 시위가 김제 장날 장터에서 불이 붙었다. 공허는 김제장터에서 시위하던 거렁뱅이 차득보에게 전단의 운반과 주재소등을 정탐하도록 한다. 고종황제의 장례가 끝나자 경찰과 헌병대에서 시위대를 무력 진압한다. 시위진압과정에서의 무력진압은 물론이고 10여년 전 의병들을 잡아다가 저지른 만행을 재현하듯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동네주민들 앞에서 처형한다. 만세운동중 김춘배는 순사의 칼에 찔려 죽고, 박건식은 여러 시위대들과 밤이면 일인들의 농가를 기습해 불을 지른다. 백종두는 친화회의 건달패들을 이끌고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가 야간기습을 당해 몰매 맞아 죽는다. 누군가의 밀고로 야간 활동이 경찰에 알려지자 도망다니던 박건식은 가족들과 함께 목포로 피신 이주한다.

  3월 만세 시위를 계기로 만주 서간도에는 여러 개의 단체가 생기고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군정부와 대한독립단이었다. 군정부는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대부분 신학문을 접한 대종교 교도들이었으며 대한독립단은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거의가 평안도 양반출신들이 모인 단체였다. 군정부에 속한 지삼출과 방대근은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만세시위 주동자로 피신해 오거나 독립투쟁에 나설 각오로 집을 떠나온 젊은이들을 맞이한다. 통화시가지에서 만세 시위를 하던 수국이를 본 지주 추가 아들이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강압하자 방대근이네 세 식구는 송수익의 소개로 북간도로 이주하여 정의단의 환대로 정착하게 된다. 북간도에서도 만세시위를 계기로 독립운동단체들이 17개나 생겼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한정의단과 대한국민회였다. 상해임시정부를 유일 정부로 인정함과 아울러 그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대한정의단은 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며 대한국민회도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통합노력에 호응하고 나섰다. 그러나 서간도의 대한독립단과 북간도의 군무도독부는 상해임시정부가 임금을 받들지 않는다며 호응하지 않는다. 한편 김시국은 감골댁을 찾아 수국이와 결혼을 청하나 수국이로부터 거절당하고 밀정으로 스며든 양치성에게 살해 당한다.

  미국정부가 1917년 동양인 절대배척법을 제정, 사진결혼을 중단시키자 장가를 못 든 조선남자들의 수가 장가를 든 수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하와이나 중국여자들과의 결혼은 절대 하려고 하지 않았다. 3.1만세 소식이 바다를 건너오자 하와이도 들뜨며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방영근은 교회를 찾아 목사의 손을 빌려 고향에 편지를 띄우나 답장을 받지 못하고 점점 말이 없어지며 우울해져 갔다. 한편 최유강과 안재한은 주재소의 협박으로 친일단체인 자문위원회에 가입되며, 서무룡은 경찰의 사주로 일심회, 장덕풍은 보광회 회장을 조직한다. 일제는 그전의 폭력통치를 호도하기 위해 허울좋은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에 앞장섰던 젊은이들이 상해로 몸을 피신하고 그들은 상해임시 정부에서 소개하는 여러 독립군 단체들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여 배속된다. 북간도의 대한북로군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에 승리하지만 서간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합동수색대에 의해 독립군 소탕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송수익의 마을에 들어온 토벌대에 의해 배두성이 살해되고 천수동은 잡혀간다. 만주땅의 군벌 장작림의 묵인아래 일본군은 서간도 일대를 뒤지고 다녔던 것이다. 또한 마적때들의 신흥무관학교 습격이 자주 일어나자 폐교시키고 학생들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으로 편성하게 된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이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자, 중국군과 독립군은 서로 타협하여 교전하지 않기로 한다. 일본은 중국군의 토벌이 전혀 실효가 없자 훈춘사건을 조작해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마을을 불질러 댔다. 일본은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인을 죽이고 그 빌미로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은 연합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인다.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소대장으로 청산리 백운평 전투에 참가 한 방대근 부대는 완전한 승리를 하며,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그 연합부대는 완루구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독립군들은 청산리 일대와 반대쪽으로 길을 떠난다.

  간도 출병에 대패한 일본은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농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양치성은 농민들의 토벌이 시작되기 전에 영사관 임형사와 모의하여 수국이를 체포한후 토벌대를 안내하여 감골댁과 그녀의 마을 주민들을 몰살시킨다. 동생 방대근의 거처를 대라고 취조당하던 수국이는 임형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양치성에게 넘겨진다. 양치성은 수국이와 함께 감골댁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치러주는등 가면의 선심을 쓴다. 독립군들을 뒤쫓다 놓쳐버린 일본군들은 조선농민들 토벌을 더 확대하고, 시교당 예배당 등을 포함 3천여 채 이상을 소각하고 1만여명을 살해하였다. 이를 경신참변이라 한다.



# 제3부 「어둠의 산하」(7~9권)

  불이흥업주식회사에서 간척사업을 실시하면서 농민들을 상대로 인부들을 모집한다. 힘든 일이지만 개간비를 지불하고 영구 소작권을 주며 소작료를 처음 3년 동안 면제해준다는 호조건이었고, 토지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도 제대로 얻지 못해 허덕거리던 농부들 3천명이 간척지로 모여든다. 외리의 남상명과 3.1만세때 죽은 내촌의 김춘배의 아들 김장섭 등 외리와 내촌 사람들도 일부 간척사업에 나섰다. 그러나 처음 모집시에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식비와 부식비를 착복당한다. 그러나 영구소작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견딘다.

  보름이는 이마에 큰 흉터가 생기자 세끼야에게 버림을 받는다. 3․1운동때 도망가던 학생을 도와주다 쫓아 들어온 순사에게 맞고 흉터가 생겨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보름이는 오히려 세끼야에게 놓인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보름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서무룡은 20원을 건네고 그 돈으로 보름이는 째보선창에서 떡장사를 하게 된다. 서무룡이 뒤를 봐주어서 떡장사를 무사히 하던 보름이는 우연히 지나가던 백남일의 눈에 띄어 폭행당하고, 서무룡의 부하들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를 알게 된 서무룡은 보름이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 백남일을 고소하고 유치장에 가둔다. 몸이 단 백남일은 결국 보름이에게 피해보상을 하고 서무룡에게는 매달 정미소 자릿세를 내기로 합의한다. 사정이 조금 피게 된 보름이는 부안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무 오월이를 정미소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결심한다. 오월이는 가장 친한 친구임과 동시에 자신을 구하려고 멀리 이국땅으로 갔던 오빠가 좋아하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차득보는 3.1운동 당시 김제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 것을 계기로 공허를 만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신세호의 집에서 기거한다.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신세호에게 공부를 배우게 된다. 송수익의 큰아들 송중원은 3.1운동 주동자로 2년 동안 감옥살이하고 출감한다. 출감하는 날 장인 신세호는 일본유학을 권유하고 송중원이 넉넉지 못한 살림을 걱정하자 송중원의 모친과 상의가 끝난 일이라며 단호히 당부한다.

  수국이는 용정에서 양치성의 첩으로 살아간다. 양치성이 밀정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채 단순한 장사꾼으로 알고 생활한다.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더 심해졌다는 소문을 들은 수국이는 동생 방대근을 걱정하며 양치성에게 그의 소식을 알아 달라고 부탁한다. 만주와 청산리 일대의 독립군들이 연해주로 이동하자 더 이상 중국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 일본군에게 중국은 조선땅으로의 철수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연해주로 간 독립군들은 러시아 적군에게 공격을 당해 다시 만주땅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러시아로 이동한 방대근 독립군 부대들이 자유시에서 참변을 당하고 무장 해제까지 당하자 대한독립군단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방대근은 노병갑과 함께 러시아 국경을 넘어 산동성에서 돈벌이를 나선 떠돌이 행세를 한다.

  수국이는 결국 양치성이 밀정임을 이웃 아주머니로부터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잡혀갔던 것이며 어머니 감골댁의 죽음 및 장례를 치른 것, 어느날 김시국이 행방불명된 것 등 모든 일이 양치성이 꾸민 흉계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몇 개월간 양치성을 속이고 도주할 준비를 한 후 그를 칼로 찌르고 서간도 통화현 지삼출네 마을을 찾아간다. 한편 방대근은 송수익의 동의를 얻어 북경 의열단에 입단한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열혈 청년들이 스스로 몸을 폭탄삼아 적진으로 뛰어 드는 독립투쟁 단체로서 1919년 11월에 결성되어 이후 3년 동안 조선에서 여러 차례 폭탄공격을 감행한다.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수배 당하던 공허스님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는 도림과 헤어지고 경성역에서 밤기차를 타게 된다. 수배령 때문에 기차마저도 밤기차만을 타야 안심이 되는 탓이었다. 경성을 자주 오르내리던 장칠문이 자고 있는 공허를 발견하고 "공허스님!"하고 부르자 공허는 어떨결에 "어엉? 누 누구여!"라고 대답하고 발각된다. 그러나 통로로 끌려나가면서 거물을 잡은 기쁨에 들떠 있던 장칠문을 들이받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그는 대전 포교당에서 다친 다리를 치료한 후 홍씨 집으로 피신한다.

  정상규는 형한테서 재산을 나눠 받은 후부터 오로지 만석꾼이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 독한 자린고비짓을 하고 소작인들에게 모질게 다루며 종부리듯 한다. 그는 소작인 한서방에게 소작을 떼겠다고 협박하여 한서방의 처를 범하는 금수같은 짓을 하기도 한다. 정도규는 그런 형의 행동에 분개하여 형을 충고하나 그는 변하지 않는다. 정도규는 동경유학시절 사회주의를 접하고 사상서적을 들여와 유승현에게 전한다. 유승현은 만세사건으로 2년 6월의 형을 살고 나오며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공허스님을 정도규에게 소개한다. 조선 노동공제회, 서울청년회, 동경고학생동우회 등 사회주의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 진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나홋카는 지리적인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더불어 일본군의 정보를 얻기 위해 빨치산에게는 중요한 정보수집처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빨치산에서는 그 곳에 부두노동자로 위장한 정보원들을 심어놓았다. 홍범도 장군의 은퇴와 더불어 자유시참변으로 적군에 소속된 독립군들이 빨치산 투쟁에 투입되면서 부대원들 일부가 분산되며 이광민과 윤철훈은 선요원 훈련을 받고 우리스크,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나홋카, 수청, 연추령 등을 무대로 정보원들과 연결하는 선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빨치산의 공격으로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소련 정부와 협상으로 1922년 10월 러시아 땅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신한촌에서 윤철훈이 그의 사촌여동생 윤선숙을 이광민에게 소개하자 그는 고향의 아내를 떠올린다.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 소작인들을 조종하여 여러 곳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총독부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단속방침을 발표하고 검거색출 활동을 시작한다. 애타는 농장조합원들은 하시모토의 의견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경찰에 촉구할 것을 의결하며 하시모토는 그의 농장관리체계를 일본 군대식으로 조직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으려 한다. 말을 타고 논길을 걷던 하시모토는 아이들이 비행기 놀이를 하면서 안창남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게 되고 화가 난 하시모토는 아이들을 채찍질한 뒤 주재소에 이를 주지시킨다. 하시모토는 물론이고 주재소장에게까지 호된 추궁을 당한 주재소 순사들은 눈에 독이 올라 마을을 뒤지지만 이미 소문이 퍼져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절대 입밖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안창남은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청년 비행사로서 조선사람들도 일본사람을 능가할 수 있다는 슬픈 위안이었고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고무시키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국제공산당 고려국 소속 자금운반책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철훈, 이광민은 하바로브스크의 고정자금책 조강섭을 만나 자금을 수령한다. 조강섭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하바로브스크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고정자금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동만은 동경유학을 떠나는 작은아들 이경욱에게 간척지로 개간한 땅을 보여준다. 측량기사인 큰아들과 자신이 이룩한 땅이라며 자랑하고 공산주의를 가까이하지 말고 판검사시험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고, 이경욱은 불만스럽지만 아버지의 잔소리가 길어질까 억지로 대답한다. 그 넓은 간척지 가운데 자리잡은 저수지를 사이로 남쪽과 북쪽은 집의 모양이 틀렸다. 남쪽집들은 모두 움막이었는데 북쪽은 모두 기와집이었다. 그건 간척사업에 동원됐던 인부들과 일본에서 이주해온 일본인들의 집의 차이였다. 간척사업에 동원되었던 농민들은 3년 동안 막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영구소작이라는 희망으로 견뎌 왔지만 일본은 조선인의 열 배가 넘는 땅을 일본인들에게 분배하고 기와집까지 지어준 것이다. 조선인부들은 분노하지만 무장경찰들 앞에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그나마 그 소작마저 떼이지 않을려면 반항도 하지 못했다. 불이농장의 간척지 소작인들은 소작지의 위치에 따라 움막을 치고 마을을 형성하게 되고 정도규와 군산 영명중학교사 고서완의 조종으로 소작회를 결성한다.

  동경에 유학중인 송중원은 모자라는 학비를 충당하고 고학생학우회에서 사상 학습을 받기 위해 방학에도 귀향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노동자들의 실태조사를 위해 막노동을 하며 모여살고 있는 사람들의 숙소로 찾아가 그저 같은 동포의 정을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조사를 한다. 조선인들은 일본땅에서도 마찬가지로 심한 차별을 당하고 있었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개학식날 송중원, 허탁, 허탁의 중학교 동창이며 만석꾼아들 홍명준, 종로상권을 주름 잡는 거상의 딸 박정애 등은 만나 점심을 먹으러 간다. 그러나 점심식사 중 지진이 일어나고 혼비백산하게 된다. 다음날 송중원과 허탁은 평상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과자공장에 출근해 엉망진창이 된 공장을 정리한다. 일본인 주인은 감동해서 조선인들이 부지런하고 예절바르다며 칭찬한다. 그러나 곧 일본 내에서는 지진과 동시에 발생한 많은 화재가 조선노동자들이 한 일이라는 음해보도가 돌고 일본인 경방단 자경단 재향군인들이 조선인들을 무더기로 살해한다. 공장주인은 억울해도 참고 몸보존 한 뒤 후에 일의 내막을 밝히라고 설득하며 그들을 공장에서 내보내질 않는다. 그사이 일본인 경방단 자경단 재향군인은 물론이고 헌병들과 경찰들까지 일본말이 서툰 사람은 무조건 잔인하게 살해한다. 송중원과 허탁은 얼마 전 실태조사를 위해 갔던 빈민굴의 노동자들이 가장 참혹하게 죽었다는 얘길 듣지만 차마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신세호의 집에서 공부를 배우고 농사일을 하던 득보는 신세호의 딸 월엽이와 좋아지내지만 신세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진 못한다. 놀이패에 끌려다니던 옥녀는 보성 근처에 오자 놀이패에서 도망쳐 보성의 명창을 찾아간다. 타고난 목소리를 마음에 들어한 명창의 내외는 부지런하게 일하는 옥녀를 예쁘게 보고 수양딸로 삼고 소리를 전수한다. 소리를 전수 받은 옥녀는 득보와 헤어졌던 주막을 찾아가고 주모의 안내로 득보가 살고 있는 신세호의 집으로 향한다.

  수국의 칼에 찔린 양치성은 가까스로 생명을 건지며, 그와 함께 모략해 수국이를 끌어왔던 임형사에게는 독립군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서간도로 간 수국이는 양치성의 아이를 임신하여 유산시키려 약을 먹는 등 갖은 노력을 하나 아들을 출산한다. 그녀는 젖도 주지 않으면서 냉담하게 정을 떼어내려 하고 필녀가 대신 젖동냥을 하여 키워 중국인의 집에 입양시킨다. 모처럼 남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이 한덩어리로 뭉쳐 발족시킨 대한 동의부의 복벽주의자 전덕원이 의군부를 조직하여 이탈하자 통의부는 다시 참의부로 분열된다. 통의부에 속해 있는 송수익은 시대 변화에 따른 분파극의 독립투쟁의 방책에 대해 깊은 고심을 한다.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이광민은 한인동포학교교사인 윤선숙과 함께 동심에 젖어 데이트도 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나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며 굳은 다짐을 한다. 코민테른에서 연해주의 모든 사회주의 단체를 오르그뷰에 통합하게 됨에 따라 이광민은 진로 결정에 고심하게 된다.

  중국 상해에는 구미의 여러 나라들이 모여있듯 조계에 저마다 소도시를 이루듯 하였다. 방대근은 프랑스조계의 공원에서 양자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다. 누이 수국이와 어머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된 방대근은 양치성을 살해하고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하기 위해 만주에 들르지만 이미 양치성은 정식 경찰이 되어 원산으로 간 후였다. 그 뒤로는 의열단 활동으로 매번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느라 누나와는 편지만 주고받았고 누나의 기구하고 가엾은 팔자에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임무수행을 떠나는 방대근과 윤주협을 중심으로 의열단원들이 모여들고 그들은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은 단순히 훗날의 추억을 위해 찍는 것이 아니었다. 새 임무를 맡아 떠나면 그 기념촬영이 대부분 영원한 이별이 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의무처럼 그들은 기념촬영을 하곤 했다. 중국상인의 졸개로 변장하고 조선에 들어온 방대근은 호남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한다. 군산에 도착한 방대근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를 바라보는 큰누나 보름이와 만나게 되고 고생에 찌든 큰누님의 모습에 가슴이 눈물로 젖는다. 임무를 마친 방대근은 큰누나와 다시 작별하고 한성행 열차를 탄다.

  백남일은 그의 정미소 인부들의 품삯을 일방적으로 내리고 인부 6명이 파업을 시도한다. 백남일은 그들을 해고하고 부두의 막노동자들로 대체하지만 인부들은 매일 정미소 앞에서 시위하고 대신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들을 협박하여 일을 못하게 한다. 경찰에 신고하여 인부들이 잡혀가지만 주변 다른 정비소 인부들이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파업에 동참하자 경찰은 그들을 석방한다. 그리하여 낙합정미소 파업은 8일만에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으며 조선 최초로 성공시킨 동정 파업이었다. 정도규는 고서완에게 정미소 파업의 성공을 축하하며 「민족개조론」을 쓴 이광수와 「일선동조론」을 쓴 최남선 등을 친일파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사회단체들의 난립현상은 사회주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다고 자평한다. 정도규에게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공허스님은 사회주의도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같다며 나라를 되찾자는 뜻만 같으면 누구와도 뜻을 합칠수 있다며 신용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약속한다.

  3.1만세 시위로 목포로 이사한 박건식의 어머니 대목댁은 장손 동화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두에서 고구마장사를 한다. 손자는 남편과 아들을 닮아 공부를 잘 했으며 대목댁은 그것만이 유일한 보람이고 위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부두행상을 단속하는 경찰에 치여 축대 아래로 떨어지면서 허리를 다치고 꼼짝 못하게 된다. 자신이 다쳐 며느리마저 돈벌이를 포기해야 하고 그러면 손자가 계속해서 공부를 못하게 된다는 걸 생각한 대목댁은 댓돌에 머리를 박고 자결한다.

  차득보는 월엽이가 시집가자 상사병으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보다못한 옥녀는 공허에게 중매를 부탁하고 득보는 연희네와 결혼하게 된다. 오빠에게 농토를 사주고 싶었던 옥녀는 남원명창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고 전주 권번에서 소리꾼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농토를 살 수 있게 된다. 득보는 기생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만 옥녀는 고집을 꺽지 않는다.

  동경에서 유학중인 송중원과 허탁은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고 일월회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던 중 같은 동네 출신의 새로 가입한 이경욱을 만나게 되고 이경욱은 유명한 독립투사의 아들인 그의 집안내력을 부러워 한다. 반면 이경욱의 아버지는 고향근방에서 유명한 친일파였던 것이다. 고학생 동우회 일부가 흑도회로 그건 다시 풍뢰회와 북성회로 갈라졌다. 북성회는 건설사를 조직해 한성에 거점을 마련 강화해 북풍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동경의 북성회의 명칭을 일월회로 바꾸었다. 한성에서 신사상연구회가 탈바꿈한 화요회는 23년에 조직되어 북풍회와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허탁이 과자배달을 하다가 일본인 아이를 치여 중상을 입히고 구속되자 박정애가 자기 아버지와 동업자인 거상을 통해 해결한다.

  1925년 상해 임정 의정원에서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이 의결되자 하와이 이민들의 분노와 동요가 심해진다. 그들은 독립운동자금을 상해로 보내지 않고 자의로 처분했다는 의정원의 발표에 분개하여 세금과 후원금을 더는 내지 않겠다며 끼리끼리 술타령을 시작한다. 방영근은 모금을 외면하고 구두쇠로 돈을 모아 태평양을 건넌 사람들이 부러워지며 독립자금을 꼬박꼬박 냈다는 떳떳한 긍지감도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20년이란 세월을 허망하게 느끼며 구상배의 중매로 과부와 결혼한다. 오랫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방영근의 친구 남용석은 이혼한 처(선미)가 위자료를 주지 않는다고 고발하자 그녀를 살해하고 조선 쪽 벼랑아래에서 자살한다.

  송수익은 결혼한 지 30년, 고향을 떠나온 지 15년만에 아내에게 안부 편지를 쓴다. 막상 편지를 쓰자 그동안 억누르고 억눌러왔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봇물 터지듯 터지고, 그런 마음 약함을 스스로 채찍질하며 호박반지 하나를 끼워 편지를 보낸다. 또한 송수익은 지삼출이 아들 지만복이 허약해 독립군으로 나서지 못함을 한탄하자 "친일배를 제외한 만주에 사는 모든 동포들이 독립운동을 하고있으며 만복이도 제 능력에 맞춰 일을 하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위안한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에 심도되어 대종교에 입교하지 않으며, 기존의 교인마저 탈교하는 상황을 걱정한다. 옆동네 밀정 하서방의 밀고로 천수동의 아내 솜리댁과 방수국이 밀정에 의해 납치된다. 솜리댁은 밀정의 속임수에 김동수의 본명이 송수익이란 것을 실토하고 살해되며, 수국이는 그들 밀정이 양치성의 사주로 자기를 납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인계로 유인하여 밀정을 죽이고 도주한다.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은 소작인들이 '소작료불납동맹'을 맺고 소작료를 강제징수하려는 정상규와 그의 마름들을 내쫓는다. 정상규는 납세자 보호를 내세워 경찰에 도움을 청하나 일본인 농장에서 일어나는 소작쟁의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며 거절당하기도 한다. 그는 돌깍쟁이짓을 하며 만석꾼이 되기 위해 논을 사들였다. 정재규는 군산 미두놀이에 빠져 해마다 논을 파는 양이 늘어가고 있었다. 인천미두와 군산미두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정도규는 형들의 일을 마음에 접어버리고 동척 및 일본인들 농장에서 소작쟁의를 일으키게 하기 위해 조직확대를 진행시킨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에서 잡지사 기자를 하고 있는 송중원과 조직을 통해 연결되었다.

  불이흥업주식회사 마름인 이동만은 빚놀이 돈장사로 많은 돈을 모아 7천석잡이가 된다. 55세를 맞은 그는 신년 신수점에 환갑잔치처럼 생일잔치를 하면 부귀영화와 수면장수한다는 점괘로 잔치를 벌인다. 이경욱은 아버지의 생일잔치에 소리꾼으로 불려온 차옥녀(옥비)의 소리와 자태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한편 원산 경찰서 형사인 양치성이 군산출장 중에 만주 송수익의 정보를 탄로하자 송수익의 가족과 신세호가 체포된다. 송수익의 아내 안씨와 아들 송중원, 신세호는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해 반죽음이 된다.

  한성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이 7일을 넘기고 10일이나 연장하며 초만원을 이룬다. 영화 「아리랑」은 나운규의 작품으로 일본인을 감독으로 내세워 총독부의 검열을 피해 상영되면서 조선사람들 전부의 가슴을 뒤흔들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것이다. 허탁, 홍명준은 「아리랑」을 관람하고 문학이 독립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송중원이 문학을 하려고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송수익, 지삼출 등은 길림성 부근의 땅을 소작료가 아닌 저렴한 사용료로 장기간 빌리게 된다. 그들은 나이든 대원들의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난 대원들을 중심으로 독립마을을 건설하고 그곳을 투쟁사업의 거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한편 송중원의 전주고보 동창인 이광민은 윤철훈과 함께 소만 국경을 넘나들며 만주에서 공산당 운동을 한다. 이광민을 사랑하는 윤철훈의 사촌동생 윤선숙은 애뜻한 정을 느끼고 있는 이광민이 공산주의 국제연대를 위해 중국 광동으로 떠나려 하자 그에게 몸을 허락 정을 나눈다.

  사찰과장 고마다는 이동만의 생일잔치에서 소리꾼 옥비를 본 다음 그녀를 탐내기 시작한다. 그는 이동만에게 노골적으로 자기의 속뜻을 털어놓았다. 이동만은 사람을 가운데 놓아 여러 차례 거금의 돈을 주고 그녀를 사려하나 천만금을 준다해도 소용없다며 거절당한다. 고마다의 안달에 노심초사하던 이동만은 옥비와 득보남매가 서로 끔찍하게 위한다는 것을 알고 득보를 미끼로 옥비를 유린한다. 차득보를 농우회원 이라는 이유로 구속하고 석방해 주겠다는 미끼를 만들었던 것이다. 양치성의 밀고로 송수익 일가가 투옥되자 금강산으로 피신했던 공허스님은 양복에 중절모자를 쓰고 콧수염까지 기른 개명 멋쟁이로 가장하여 최유강, 안재한 등을 만나 신간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회원들을 물색해 줄 것을 부탁한다. 송수익의 작은아들 송가원은 전주고보생들의 동맹휴학으로 일인 교장을 몰아내고, 주동자로 퇴학처분 당하여 모친 병수발하며 수감중인 형 중원을 면회다닌다. 송수익의 처 안씨는 출감하여 중풍으로 고생하며 송중원은 징역살이하게 된다.

  못 먹고 헐벗으며 갖은 고생을 하며 아들 삼봉이를 남부럽지 않게 가르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일념으로 살아온 보름이는 자그마한 점방을 차리고 17살된 삼봉이를 고보에 입학시키며 감회에 젖는다. 총기 좋아 세끼야를 잊을 리 없는 삼봉이가 세끼야의 딸인 큰딸 금님이를 구박하지 않고 아껴주는 속 깊고 듬직함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내림이라고 생각했다. 손판석의 아내 부안댁은 큰아들 일남이가 늦게나마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점에 보낸 것을 생각하며 삼봉이의 고보 입학을 축하함과 아울러 부러워한다. 손판석 가족 아홉 식구는 먹고살기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무주에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산소를 찾은 삼봉이는 어머니로부터 그들이 왜놈들에게 피살당한 것을 듣고 부모의 원한을 갚겠다고 다짐한다. 송수익의 처 안씨를 병문안가는 신세호는 당산나무아래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새로운 아리랑 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유행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3․1운동이 행동적 저항이라면 활동사진 「아리랑」은 정신적 저항을 공감시킨 것이었다. 송중원은 면회온 동생 가원이에게 의사가 되면 자유스럽고 좋은 일도 할수 있으니 경성제대 의학부에 진학하라 권유한다.

  1927년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국민정부를 조직함에 따라 국공(국민당과공산당)분열이 이루어지게 되자 광동 중국 혁명군에 가담했던 조선의용군들은 크게 낙담하여 분산한다. 그들은 국제연대에 의해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조국해방을 달성하자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연해주의 독립군 100여명 만주의 독립군 400여명, 국내에서 온 100여명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연해주에서 온 윤철훈은 돌아가기로 결정하며 이광민은 의열단의 방대근을 찾아간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윤철훈을 통해서였다. 윤철훈은 광동에 도착하자마자 의열단을 찾아 나섰다. 의열단이 광동으로 이동해 있다는 것을 상해에서 알았던 것이다. 국내에서 온 허탁은 만주에서 온 독립군들을 찾아다니며 송수익을 아는 사람을 찾던 중 천수동의 아들 천상길을 만나 송수익을 찾아간다.

  이동만은 불이흥업주식회사에 요시다가 퇴임하고 새로 부임한 지배인으로부터 해고당한다. 그는 아들 이동만이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한을 풀어주기 바라며 동경법대를 졸업한 아들을 절간에 몰아 댄다. 절간에서 공부하는 이경욱은 대학 3학년말 아버지의 생일잔치에서 보았던 소리꾼 차옥녀의 모습이 아른거려 책을 잡을 수 없었다. 애타게 그녀를 찾던 이경욱은 머슴으로부터 그녀가 사찰과장에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더욱 그리워한다. 한편 하시모토는 농장을 군대식으로 조직해 외부세력의 침투로 발생하는 소작쟁의 근절책을 추진하여 효과를 보게 되며 억압을 당하는 소작인들의 불만이 커지게 되자 출산한 소작인들에게 미역을 선물하는 선심을 쓰기도 한다

  조선공산당은 파벌간의 싸움으로 당의 분열과 소모를 초래하고 상대측을 경찰이나 헌병대에 밀고하는 등 자멸하여 붕괴된다. 중앙당 생활을 하던 정도규는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에 고서완과 함께 체포된다. 광동 국제공산군에 가담했던 허탁은 천상길의 안내로 만주 송수익을 상면하고 귀국한다. 출감하여 몸을 추스리고 있는 송중원을 방문한 그는 집안에 서려있는 궁색함을 느끼며 하룻밤을 지내고 상경한다. 허탁은 만주에서 송수익을 상면했을 때를 회상하며 송중원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허탁이 송수익에게 고향의 아내 및 아들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전하자 별다른 내색을 않던 송수익은 그믐달이 뜬 새벽 어둠 속의 허허벌판 만주땅에 무릎을 꿇고 흐느꼈던 것이다.

  유행성독감으로 손판석의 일곱 살난 막내아들과 간척지에 살던 남상명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남편 남상명의 병수발 등으로 빚을 지게된 죽림댁에게 빚쟁이 한씨가 빚을 핑계로 그녀의 19살난 딸을 요구하자 그녀 가족은 군산의 박건식에게로 야반도주한다.

  송가원은 경성제대 의학부에 입학하지만 모친이 사망하고 가산이 기울자 휴학하러 한다. 박정애는 허탁을 앞세워 학비를 빌려주고 송가원이 거절하자 졸업 후 갚으라 강요한다. 일본 사람들이 신식기계로 사금 채취를 한다는 소문과 금산면과 금구면 일대에 금바람이 불며 그 일대의 땅임대료가 솟는다. 불이흥업에서 해고당한 이동만은 일본인 기술자 우노사와와 이익금을 반분하기로 합의하고 사금채취를 시작한다. 그의 아들 이경욱은 고등고시에 낙방하고 아버지의 사주로 차옥녀가 사찰 과장에게 유린당한 사실을 알고 죄의식과 안타까움으로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일으킨다.

  김제군의 동척소작인 천여명이 신간회의 조종으로 소작료 인하 및 수리조합비 면제를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킨다. 서당 사건과 송수익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신세호는 공허의 권유로 신간회의 간부자리를 맡게 되며 차득보는 청년회원으로 가입한다. 타작철이 되자 굴통탈곡기를 꺼내던 차득보는 울화가 치민다. 쇠홀태만으로도 타작은 불편이 없었지만 일제는 일본재벌회사들을 비호하기 위해 강매했던 것이다. 이런 불만들이 더욱 모아져 소작쟁의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1929년 나주에서 일본학생들이 조선여학생들을 희롱하는 것을 본 조선학생과 일본학생들 사이의 싸움이 민족감정으로 충돌하여 전국학생운동으로 점화되었다. 마침내 경성제국대학과 서울의 고보 조선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서울 학생들의 시위소식이 각 지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군산의 오삼봉네 학교에서도 시위가 폭발한다. 시위를 주동한 오삼봉은 구속되며 목포상고를 다니는 박건식의 아들 동화는 퇴학당한다. 신간회와 근우회 간부들이 검거되고 총독부에서는 아리랑에 대한 전면 금지령을 내린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해서 일어나 1930년 3월까지 계속되며 학생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194개교, 투옥된 학생 580여명, 퇴학 및 무기정학 당한 학생이 2,330여명에 이르렀다.

  신채호 선생은 무정부주의 투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한 대량의 유가 증권을 옮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 갇힌다. 독립운동자금이 차츰 고갈되어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수 된 것은 재산을 지키려고 혈안이 된 지주들이 이래저래 친일파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수익은 신채호 선생의 체포와 3부 통합의 실패를 보며 무정부주의 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3부 통합은 고질적인 분파의식과 주도권다툼으로 실패하며 어느 파당이나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은 신채호 선생이 무정부주의였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1국 1당 조처로 의열단은 만주 각처로 활동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가 취해졌다. 방대근과 이광민도 만주로 가게되며 윤주협은 간호사 민수희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길림에 도착한 방대근이 송수익에게 이광민을 소개하자 이광님은 이미 20년 전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송수익을 보고 놀란다. 게다가 송수익은 자신과 가장 친했던 후배이자 동료인 송중원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하룻밤과 한나절동안 퍼부어댄 폭우로 간척지가 물바다로 변한다. 남자들이 간척지의 방죽을 지키러 떠난 사이 허술하게 지어진 집이 무너져 떠내려가고 많은 여자와 아이들이 죽는다. 한기팔의 19살난 큰딸이 두 동생을 지붕에 올려놓고 익사하며 김장섭의 6살 먹은 아들도 물에 떠내려갔다 이동만의 사금광도 물에 휩쓸려 난장판이 되고 동업기술자 우노사와는 건달패들과 손잡고 이동만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며 금석을 빼돌리는 등 사기를 친다. 이동만은 사금사업에 손댄 것을 후회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공허의 소개로 옥비를 만난 송가원은 서로 마음이 쏠리고, 송가원은 옥비의 거처를 알아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결국 이동만은 우노사와에게 고스란히 사기를 당하고 결국 사금을 캐기 위해 파 놓은 흙더미 위에서 객사한다. 이경욱은 아버지의 파산과 객사한 형편 때문에 고등고시에 대한 마음이 더 다급해지지만 옥비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을 잡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편지를 보낸 뒤 홍명준 변호사의 사무실에 들르고 거기서 만보산 사건에 대해 듣게 된다. 이 사건은 왜놈들이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중간에서 이간질하여 서로에 대해 폭행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구상배의 중매로 결혼한 방영근은 세 번째 아들을 낳고 동네어귀에 있는 샌달우드 나무둘레에 쌓여있는 돌무더기에 돌을 올려놓으며 무병하니 잘 크게 보살펴 주기를 기원한다. 어느덧 샌달나무는 고향의 당산나무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만큼 그 주변엔 돌무더기들이 이루어 진 것이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방영근은 고향생각에 더욱 애달프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로 젖는다. 이승만 탄핵과 박용만이 밀정으로 의심받아 살해되자 더 이상 하와이의 조선인들은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호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의 특수공작을 돕자는 특별헌금을 시작하자 하와이의 사람들은 1천만 달러를 미국 우체국을 통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낸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들이 만주를 침략한다. 자기네 관할구역에서 스스로 폭발 사건을 일으킨 뒤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는 동시에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방대근은 무정부주의 조직 확대를 위해 한국총연합회 소속 독립군 참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동창인 노병갑을 만난다. 그러나 서로 생각이 틀림을 알고 방대근은 노병갑과 헤어져 길림으로 향한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주의 상황이 돌변하고 있었다. 독립군에게는 후방이 전방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한중연합군은 신빈현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군과 중국 의용군의 합작이며 한중연합토일군은 북만주 영안현에서 한국 독립당과 중국군 제14사단이 합작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송수익은 방대근 이광민과 함께 관동군 사령부가 있는 장춘에서 관동군 사령부를 폭파하려다 중국인식당 주인의 밀고로 관동군에 체포되고 방대근과 이광민을 피신시킨다.

  미두로 만석꾼 재산을 다 날린 정재규는 아내에게 면박당하며 살고 동생 정상규와 징역살이를 하는 막냇동생 정도규의 아내에게까지 손을 벌린다. 고서완은 3년, 정도규는 3년 6개월의 징역살이 후 마을에 연금된 상태로 살아간다. 사찰과장은 일본에 협조하면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정도규를 회유하기도 한다.

  송가원과 민동환은 상해사변 승리 축하장인 흥구공원에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가 일본 백천대장 및 고급군관 고관료 10여명을 폭살시킨 사실을 통쾌해 하나 앞날을 걱정하며 명창 옥비가 일하고 있는 상춘관을 찾는다. 송가원이 시위때 눈을 다친 민동환을 병원에 데려다 준 인연으로 술친구로 가까워진 것이었다. 식자층사이에서는 앞으로 2백년 정도는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돌며 문필가들이 한숨을 쉬며 의기소침해지고 걸인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옥비는 공허스님의 심부름이라며 송가원에게 용돈을 주곤 했다. 옥비에게 마음이 쏠리던 송가원은 공허에게서 옥비가 낭자머리를 하게 된 사연을 듣게 되고 두 남녀는 서로 애틋한 정을 느낀다 .경기평야에 만석꾼 아들인 민동환은 졸업 후 잡지사를 운영하며 송가원의 형 송중원에게 편집장으로 일해줄 것을 청한다.

  목포의 소학교에 다니는 박건식의 작은 아들 용화는 황국신민화 교육에 세뇌당해 아버지와 형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노동쟁의를 일으켜 해고당한 아버지와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형 역시 결론적으로는 힘들게 일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천수동의 아들 천상길과 김판술 아들 김건오는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당군에 입대한다. 노병갑이 중대장으로 참전하고 있는 한중연합토일군은 관동군사령부의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졸업을 앞두고 송가원은 결혼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박정애와 민동환이 서로 자기네 동생과 결혼시키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두여자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고 옥비에게 계속 마음이 쏠린다. 그러나 졸업식날 박정애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송가원은 박미애와 결혼하게 된다. 민동환은 그가 창립하려는 잡지사의 편집장을 송중원이 맡도록 해달라고 송가원에게 부탁한다. 송수익은 15년형 언도를 받고 봉천감옥에 수감된다. 송수익의 작은 아들 송가원은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로 거처를 옮기기로 작정한다. 형인 송중원은 장남인 자기가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송가원은 의사인 자신이 가서 병수발을 하는 게 더 좋은 조건이라며 형을 만류한다. 송가원의 아내 박미애는 만주로 이사하는 것을 극력히 반대하고 나서고, 이에 송가원은 미련없이 혼자서 만주로 떠난다.

  하시모토는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실시하는 농촌 계몽운동을 방해한다. 그는 학생들의 바람을 막기위해 면사무소를 통해 매일밤 동네마다 강연회를 열게 한다. 동네단위로 마을회관이나 타작마당에 소작인들을 남녀 가릴 것 없이 모아놓고 강연을 했다. 서울 고무회사와 경성제사공장을 대상으로 공작을 진행하던 안종화는 검거를 피해 연금상태에 있는 정도규의 소개로 포교당으로 피신한다. 고서완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사회주의 운동을 포기한다.

  양복점에서 일본인 재단사의 보조원으로 일하는 손판석의 장남 손일남은 재단사의 갖은 학대를 견디며 재단기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일과 후 재단사 몰래 신문지를 이용해 재단을 연습하던 그는 술에 취한 재단사에 발각되어 심한 구타를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재단대에 놓인 가위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재단사를 찌르고 살인 미수로 구속된다. 부두 노동자들의 쟁의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2개월 전에 창고지기에서 해고된 그의 아버지 손판석은 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땅이 무너지는 놀라움을 겪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유일하게 기다리는 사람은 공허였다.



# 제4부 「동트는 광야」(10~12권)

  코민테른 특파원으로서 원산에서 지하노동운동을 하던 윤철훈은 고정노동운동원이며 교사인 최현옥의 안내로 원산에서 탈출한다. 윤철훈은 코민테른의 명령으로 인민들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적색노조와 적색농조를 도처에 조직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성취시키겠다는 희망으로 두만강을 넘었으나 총독부의 경찰력 강화와 만주사변의 여파로 일어나는 심리적 위축, 치안 유지법을 앞세운 무차별 검거 등으로 뜻은 이루지 못하고 탈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9월 조선 혁명당군의 지휘자 양세붕 장군이 일본밀정에게 기습당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군인들은 양세붕 장군의 시신을 조선인 마을로 옮기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농민들 강압하여 시신에 가해를 하고 목을 자른다. 이 일은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조선인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공산당 조직에 합류한 노병갑은 많은 조선인 부대원들이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고 자신도 위기에 처하자 일본군에 투항한다.

  손판석의 장남 손일남은 일본인 재단사를 가위로 찔러 살인미수죄로 수감된다. 그러나 공허와 송중원의 부탁으로 홍명준이 무료 변호를 해주고 2년형을 받는 것에 그친다. 이경욱은 아버지의 죽음 후에 형의 뒷바라지로 고시공부를 계속하지만 거듭 낙방만 한다. 형은 더 이상 뒷수발을 할 수 없으니 취직하라고 강요하고 이에 고서완의 농장에서 조직관리와 야학을 맡아 일하게 된다. 고서완은 농토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집단농장의 경영이라는 개인적 사회주의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전면 중단하고 야학과 조합을 전부 해체시킨다. 득보네 마을 염서방은 자신의 아들과 주인 와타나베 아들의 싸움으로 인해 몽둥이질을 당하고 소작마저 떼이게 된다. 분노한 염서방은 와타나베 일가족 여섯을 몰살시키고 자결하고, 차득보는 염서방이 장한 독립투사라며 염서방의 처 하정댁을 여러모로 돕는다. 일자리를 잃은 손판석은 공허의 소개로 포교당에서 기거하게 된다. 한편 유승현과 연결된 농민조직외에도 군산의 고무공장, 이리의 견사공장에도 조직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정도규는 신원보증령이란 악법으로 자신의 신원을 보증할 연대보증인 셋을 세우라는 경찰서의 명령을 받고 집을 떠나 피신한다. 총독부에서는 학교마다 군사교육과 신사참배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부친의 옥바라지를 하는 송가원은 감옥에 출입하는 일본인 의사 하야시를 통해 부친의 병보석이 가능하도록 조치하나 송수익은 거절한다. 병보석의 조건으로 쓰게 되는 전향서는 독립운동의 포기와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였고 송수익으로서는 사형선고와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송가원은 옥중에 있는 부친보다 따뜻하게 옷을 입어서도 안된다며 허름하게 지내는 등 효심이 극진했다. 차옥녀는 박미애를 만난 다음에 만주로 송가원을 찾아갈 마음을 굳히게 된다. 박미애는 옥녀를 찾아가 송가원은 이제 자기 남편이 아니라며 만주로 가면서 갈라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던 것이다. 옥녀는 봉천에 도착하고 서울보다 번화함을 느끼며 송가원이 일하는 일광병원을 찾는다. 송가원은 그녀를 반가워하고 끌어안았다. 옥녀는 송가원이 그토록 반가워 할 줄을 몰랐다.

  소수민족의 러시아 동화정책으로 연해주의 조선인 자치가 불가능해지면서 여러 곳에서 일본 스파이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소련 비밀경찰의 반동 숙청 바람이 분다. 조강섭, 윤선숙부부는 윤철훈에게 도움을 청해 일본스파이로 오인되어 구속된 강윤배와 최진순 부부를 구출한다.

  장덕풍은 노망하여 가족들에게서 외면당하며 그의 아들 장칠문은 경찰을 사퇴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으며 일조물산주식회사를 차리고 상공회의소 회원이 되며 큰아들을 경찰에 넣는다. 백남일은 아편쟁이로 전락하여 재산을 탕진하고 정미소와 미선소를 장칠문에게 넘겨준다. 학생운동으로 1년 감옥살이하고 풀려난 오삼봉은 학교를 퇴학당하고 혈청단을 조직하여 부안, 옥구, 이리 일대의 친일파들 4명을 살해한다. 그는 출감하는 친구들을 모아 다섯이서 혈청단을 조직했던 것이다. 수가 많으면 비밀이 샐 우려가 있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가족만 면회가 허용되어 면회를 하지 못했던 필녀는 쓰지 않고 모았던 돈을 내밀며 송가원에게 송수익의 면회를 주선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필녀와 면회을 한 송수익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여 만주벌판에 뼛가루를 뿌리라 유언하고 운명하게 된다. 송가원, 옥녀, 필녀, 수국이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선만척식주식회사가 창립(1936)되어 만주 이민을 전국적으로 모집한다. 부두에서 막노동으로 하루살이 생활을 하고 있는 부두노동자들에게 이민바람이 일어났다. 목포 남만석은 척식회사의 선전에 유혹되어 그의 매형 김진배 가족과 함께 만주에 이민 가기로 결심한다. 박건식은 위암으로 사망하며 그의 아들 박동화는 학생운동에 참여 한 것을 후회하며 관청에 일자리를 옮기려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질 않는다.

  조선족 몽고족 티베트족 등 소수민족은 항일통일 전선을 구축하여 동북항일 연군이란 유격대를 조직한다. 송가원은 홍두산 원송골에서 다친 유격대원들을 치료하며 옥녀는 그들을 간호한다. 방대근은 항일연군 사령부 직속으로 밀정과 악질 친일배들을 색출하고 제거하는 별동대의 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에 투항하여 수색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집을 습격하고 그 대상이 옛 친구인 노병갑인 것을 알고 놀란다. 그러나 가슴 아픔을 뒤로하고 노병갑을 살해한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호외로 독립군들이 함경남도 보천보기습에 대해 보도가 되자 잡지사 편집장인 송중원은 사장인 민동환에게 그 사건에 대해 그 진상을 자세하게 다루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민동환은 거절하며 문인들 원고료 선불을 억제해 달라고 주문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편집권을 위임하며 잡지의 적자는 평생걱정 없다고 장담했던 사장의 마음이 변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송중원은 충격을 받고 고심한다. 그 두 가지 조건이 불변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동생의 친구라는 거북스러운 입장도 감내하기로 했던 것이다. 한편 허탁은 기와공장에서 노무자로 피신 생활하며 소극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보름이는 큰딸 금님이를 철공소 직공에게 시집보내고 아들 삼봉이를 혼인시키려 하나 삼봉이는 돈을 더 벌어 갖고 가겠다며 얼렁뚱땅 넘기곤 한다. 보름이는 아들이 무언가 남모르는 일을 하는 것이라 짐작하지만 묻지 않는다. 묻는다고 사실대로 대답할 것 같지가 않았고 또 아는 것이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오삼봉의 혈청단이 발각되고 보름이네 가족은 공허의 안내를 받아 피신한다. 오삼봉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하기를 희망하고 공허는 같은 혈청단원 배영범과 오삼봉을 만주로 안내한다. 그러나 압록강변에서 그들 일행이 노출되자 공허는 둘을 피신시키고 방패막이가 되어 총을 맞고 죽는다.

  윤철훈은 열성 당원 차은심과 결혼하여 관동군 기지인 장훈에 침투하여 사진관을 운영하며 관동군에 대한 첩보 활동을 한다. 윤철훈의 동생 윤선숙네 가족과 그 일대에 살던 조선족 1천 6백여명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다. 조강섭은 이동 중 부당한 대우에 대해 12명의 대표자와 함께 소련군에 시정 요구하다 행방불명이 되고, 그의 아내 윤선숙은 졸지에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동 중에 시어머니가 혹한과 허기에 죽게 되자 눈장례를 치르는 아픔을 겪는데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그렇게 죽게 되자 눈으로 봉분을 만들어 장례를 치렀던 것이다.

  일본군의 만주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은 1934년부터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이 그 세력을 확장하자 막대한 병력을 토벌에 투입한다. 방대근은 항일연군 제1군 제3사 사장을 맡고 이광민은 제3사 2단장 직책을 맡으며 보천보전투로 항일연군의 사기를 높인 김일성은 제2군 제6사의 사장을 맡았다. 필녀 및 수국이와 오삼봉은 후방대에서 활동하였다.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인 노조에 소장을 토벌대장으로 한 (만주3개년 치안숙정계획)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3월까지 실시하며 7만 5천명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항일연군 간부들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붙은 전단이 뿌려지며 항일연군은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소부대로 분사하여 일본군을 피하고 있었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칠 대로 지친 천상길, 오삼봉, 필녀, 수국은 전사하고 방대근은 부대원들과 후일을 기약하고 총을 땅에 묻고 해산한다.

  하와이 이민자들의 좌장 구상배는 이민온 지 33년만에 폐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몇 십년이 지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늘 한결같았던 그들은 서로 믿고 의지해왔으나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는 현실에 방영근은 마음이 아프다. 결국 구상배는 사망하며 방영근이 농장 조장으로 선출된다.

  공허스님의 소식이 끊기자 차득보와 운봉스님은 만주 길림성 지삼출네 마을을 방문하여 그간의 소식을 알게 된다. 차득보는 동생이 연모하는 사람을 찾아 만주까지 와서 뜻을 이루고 목숨 걸고 싸움터로 뛰어든 것에 대해 놀라워하며 가슴 뿌듯해 한다. 손판석은 아들 손일남이 재단 기술자로서 수입이 좋아지자 이리로 이사하여 안주한다. 보름이네는 삼봉이의 혈청단 사건으로 수배되자 홍씨집으로 피신한다.

  정상규는 만석꾼이 되지만 대부분의 다른 지주들이 그러하듯 소작인들을 몰아세우는 못된 지주였다. 민물 새우 알 젖을 장만하기 위해 소작인들의 아내를 내몰아 새우잡이 사역을 시키고 자린고비 짓을 하며 아들들의 교육비조차 아까워한다. 그의 큰아들 정방현은 대학에 못 가게 되자 술주정꾼이 된다. 알거지가 된 정재규는 동생에게 작인 부칠 논을 부탁하나 거절당하고 들녘에서 객사한다. 많은 악법들이 나오면서 사면초가에 직면한 정도규, 유승현은 위장 전향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사십오세였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천산산맥 부근의 타슈켄트 황무지에 강제 이주당한 조선아이들과 노인네들이 물이 달라지면서 생긴 풍토병에 의해 줄줄이 죽어갔고 윤선숙의 아들도 죽게 된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라는 식으로 황무지에다 내다버린 것이었고 이에 분노하여 관에 항의했던 대표들이 기차에서처럼 종적이 묘연해졌다. 소련정책에 대한 반동행위라는 죄목이었다. 또한 고려인은 10년동안 이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금족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배급받은 잡곡으로 근근히 배를 채우고 날마다 개간이라는 중노동에 시달리며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려 힘쓴다. 윤선숙은 아리랑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경찰의 신문을 받고 아리랑의 금곡령이 내려진다. 또한 식자층이나 똑똑한 사람들은 딴 곳으로 이송되었다. 죄목은 일본스파이거나 소비에트 정부를 반대한 반동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풀 죽고 맥빠진 채 첫 농사의 가을걷이가 끝나고 집집마다 쌀이 분배되었다. 쌀밥을 받은 윤선숙의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윤선숙은 목이 메어 밥을 떠 넣을 수가 없었다.

  박건식의 작은아들 박용화는 광주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유기준과 함께 자취하며 일본인 검사 아들의 가정교사로 고학하며 방학에도 집에 가지 못한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간 유기준의 책꽂이에서 「사회주의와 조선혁명」이라는 인쇄물을 발견하고 한방에서 까맣게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잠시 가정교사집 주인인 이시하라한테 제보해서 대학가는 기회를 삼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이시하라의 딸 에이코는 신년휴가로 부모가 일본에 간 틈을 타 박용화를 유혹하여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1년씩이나 에이꼬와 육체적 관계를 맺어온 박용화는 성적만 뒤쳐지며 그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곡성초등학교에 부임한다. 에이꼬의 쾌락을 충족시켜 주느라 체력만 소모하고 교육자로서 출세도 암담해져 버린 것이었다. 결국 박용화는 같은 교사인 일본인의 냉소에 자극받아 출세를 위해 다른 길을 갈 것을 결심하고 군인의 길이냐 법관의 길이냐를 두고 고심한 끝에 법관이 되기로 작정한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포위작전은 만주 항일연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일본군 보급부대를 공격하던 이광민은 총상으로 사망하며 많은 항일군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등 항일군부대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송가원은 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맡고 있는 수용소의 환자들을 투항하도록 권유한다. 투항을 역이용해 환자들을 살리자는 계획이었다. 어차피 투항자들이 계속 생겨나 지켜야 할 기밀도 없어지는 형편이기도 했다. 옥비는 하산하려는 대원들에게 타향살이와 아리랑을 들려준다. 적에게 에워싸이다시피 하고 있는 유격투쟁에서 노래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게 가까이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부르는 낮고 가늘어 더욱 애절하고 서러웠다.

  나만석 등 만척회사의 꾀임으로 만주로 이민을 떠난 조선인들은 하얼빈에서 서쪽으로 3백여리 떨어진 더 넓은 벌판에 내려진다. 총독부 정책을 대항하는 만척회사에서는 3차 농업이민 1만 1천호 모집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 2백 가구는 목포와 신안 일대 그리고 정읍과 고창일대에서 모집된 사람들이 섞인 것이었다. 그들은 가족 수에 따라 조를 배급받아 연명하며 일본군들의 감시아래 죄인과 똑같은 감옥살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남자들은 숯을 굽는 등 품삯도 없이 강제 노역을 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정읍에서 온 한서방의 16살난 딸은 군인들에 윤간 당해 자살하며 만주로 오고 부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던 남만석의 어머니는 밤중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많은 문학인들이 친일파로 전향하면서 변절자가 된다. 잡지사 편집장 송중원은 조선의 대문호로부터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가입 권유 편지를 받은 윤일랑과 함께 신세를 한탄하며 처음과 달리 마음이 변해가고 있는 사장이 친일파인 철학교수 황인곤 등을 편집위원으로 임명하자 잡지사를 사퇴한다.

  홍씨는 공허스님의 뜻이라 생각하며 보름이와 그녀의 딸 금예를 거두어 집을 마련해 준다. 모녀를 거둔다고 해서 아들 동걸이를 가르치는데는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이다. 동걸이는 공허가 지어준 이름으로 그의 성씨를 묻지 않고 가고 없는 남편의 성을 붙여 전씨가 되었다. 홍씨는 창씨개명으로 고심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그 자식들은 학교에 입학을 금지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 동걸이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혼자 걱정하는 그녀에게 아들 동걸이는 전(田)자 앞에 큰 대(大)자 하나만 놓으면 된다며 통쾌하게 웃는다. 웃음소리며 웃는 모습에서 홍씨는 공허스님의 환생을 보고 있었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되었다. 보름이의 작은딸 금예는 홍씨의 머슴 배필용에게 강압적으로 몸을 뺏기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배필용은 애기중으로 절밥을 얻어먹다 파계하고 거렁뱅이하던 중에 공허스님이 거둬 홍씨에게 데려 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한달 후에 배필용과 김춘배의 아들 김장섭은 징용을 당해 일본 시모노세키로 끌려간다. 배필용은 정을 맘껏 다 풀지 못한 아내와의 이별이 서러웠고 아무래도 아내의 마음이 변해 버릴 것만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잡지사를 사직한 송중원은 홍명준의 재판관계 자료집 발간 제의를 받으나 거절한다. 엉터리 재판기록을 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잘못된 판검사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송중원은 큰아들 준혁이만 서울에 남기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준혁이는 농과대학을 지망하고 있으나 학비가 없어 제분 공장에 취직하고 있었다. 조선은 농민들이 가장 많고 농민을 살리는 길이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아들은 진학 계획을 1년 뒤로 미룬 것이었다. 귀향한 송중원은 집을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 구입한 농토와 장인 신세호가 넘겨준 농지를 가꾸게 된다. 환갑을 넘은 신세호는 술을 먹고 술에 취한 양 면사무소나 일인들의 집에 오줌을 싸고 다녀 사람들로부터 오줌대감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꼭 일본 관련 벽에 오줌을 싸고 그런 그를 흉하게 생각 않고 별명 뒤에 대감이라는 말을 붙여 사람들이 존경을 나타냄에 송중원은 서글픈 장인의 저항정신을 배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본은 부족한 병력 준비를 보충하기 위해 군인 지원제며 징용제를 강행하게 되고 급기야 41년 2월에는 ꡐ내선일체정신대ꡑ라하여 소학교 6학년 졸업생 조선어린이들 6백명을 일본의 군수공장에 보내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부대가 해산되자 송가원과 옥비는 농사꾼으로 가장하여 마을로 들어 간다. 그들은 방대근과 함께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들어가 송가원은 해룡병원에 취직하였다. 그는 딸을 출산한다.

  소련 공산당 첩보원 윤철훈, 차은심 부부는 관동군 총사령부의 정보를 얻기 위해 사진사로 위장하여 사진관을 운영한다. 일본사람들은 사진에다 그 사진을 찍은 연유와 날짜를 써넣기를 좋아하는 유치한 취미를 갖고 있었고 윤철훈은 그들에게 그런 서비스를 해주곤 했다. 결국 장교들과 그 가족들의 호감을 얻는데 주력하고 사진을 찍으러 온 장교 및 통역관등이 예사로 흘린 말을 기억했다가 정보를 얻어내기도 한다. 또한 윤철훈은 신경역에서 밥장사를 하는 최규승과 인력거를 끄는 하서방을 포섭하여 조직원으로 활용한다. 사진관을 운영하며 관동군에 대한 정보수집을 하던 소련 첩보원 윤철훈은 발각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고 부인 차은심과 아이들은 하얼빈으로 도주한다. 그는 고춧가루 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하고 인체실험장으로 끌려간다.

  하시모토는 김제지역을 행정력으로 장악하기 위해 김제읍장으로 취임하며 군산 상공회의소장, 도회의원을 겸임한다. 송중원은 아이들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친다. 법망을 피해 소규모로 소학교 적령기에 있는 사내아이들만 열서너 명을 골라 아침나절에 글과 산수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으나 경찰에서 중지명령을 받자 다른 방법을 궁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이 공포되며 송중원은 구금조치된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일본인들은 신생강대국인 미국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들뜨고 있었다. 동경에 유학중인 전동걸은 전차에서 만난 이미화에게 조선독립을 믿어야된다고 강조하며 그녀의 하얀 치자꽃이거나 흰도라지꽃 같은 순수함에 마음이 끌린다. 이미화도 그에게서 흡입력을 느끼며 은행의 부장자리에 흡족해 하며 황국신민이 되려고 애쓰는 아버지가 부끄러워진다. 송중원의 아들 송준혁은 같은과 친구인 최문일의 소개로 고등학교부터 일본으로 유학온 거부의 손자 김민근의 가정교사로 고학한다.

  정상규가 정도규에게 아들의 취직을 부탁하나 정도규는 대학진학을 권유하며 거절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지 않으려 함을 알게 된 아들 의현은 논문서를 훔쳐 달아나고 정상규는 분노하여 쓰러진 후 반신 불구가 된다. 정도규는 위장 전향을 속이기 위해 유승현과 미곡상을 동업하며 고서완은 조선의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내용을 게재한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금된다. 성서조선은 월간지로서 김교신이 내세운 민족종교론의 실천을 위해 발간해 왔던 것이다.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민족 종교화 정신은 결국 조선의 독립에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하와이 일본인들은 재산동결령과 함께 출국금지령이 내려지며 사면초가의 고립상태에 빠진다. 일본사람들의 보호와 협조아래 암악해온 스파이들의 활동 때문에 일본이 진주만 군함들을 일시에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고 광복군을 모집하게 되자 하와이 이민 2세들은 광복군에 지원한다. 방영근은 아들이 나이가 어려 지원자격에 미달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지원을 권하기가 난처해진다.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한 박용화는 광주사범학교시절 농락당했던 가정교사집 딸 에이꼬를 찾아 성적인 복수를 한다. 전동걸은 사회주의 혁명 실천을 위한 비밀조직인 사혁회에 가담한다. 같은 회원인 일보인 지요꼬의 자기에 대한 색다른 감정으로 이미화와 그녀를 비교하기도 한다. 이미화는 만나면 아늑하고 푸근한 여자였고 공장노동자의 딸인 지요꼬는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은 동지였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요꼬는 전동걸에게 조직원이 아니 남자로써 애정을 느끼며 이미화에게 그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미화는 전동걸의 생일을 맞아 책과 함께 빨간 장미를 수놓은 하얀 손수건을 선물한다.

  남만석, 김진배 등 만주에 이민 온 조선인들은 일본 경비대의 감시 하에 숯구이 등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중국인들에게는 일본의 주구라며 핍박을 당한다. 조선인 처녀들은 일본 불량배들에게 납치되어 군인들에게 넘겨지기도 한다. 김진배의 큰딸도 그들에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만척에서 굳이 중국사람들의 농토를 빼앗아 조선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게 한 것은 그들의 군량미로 쌀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밭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중국사람들을 몰아내고 논농사가 많은 전라도와 경상도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속여 강제이민을 시켰던 것이다.

  중경의 임시정부에서는 종전 후 조선에 대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탁통치설'에 반대하는 집회를 한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각자 가진 이념을 초월하며 한국광복군 창설되자 방대근은 비밀감찰 대장의 직책을 맡는다. 중경에 잠입하고 있는 첩자나 밀정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그 조직의 임무였다.

  원산에서 지하노동운동을 하던 최현옥은 원산 경찰서 형사계장 양치성에게 갖은 고문과 함께 성 고문을 당하고 끝까지 조직의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어진 최현옥은 벽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하여 비밀을 지키는 방법을 택한다. 양치성은 그간의 공적으로는 벌써 경찰서장이 되었어야 하나 조선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경찰서장이 되질 못한다.

  일본 징용부대인 노무보국회에서 사냥식 마구잡이로 징용자를 끌어들인다. 그와 같은 마구잡이식 징용자 색출에 차득보 및 정상규의 큰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죽자 만석꾼이 된 정방현등 3백명이 붙잡힌다. 그러나 그들 중 정방현 혼자만이 풀려난다. 그는 고액납세자였고 전쟁후원금을 내는 후원자였던 것이다.

  대동아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자 징병자들의 만수무강을 비는 천인침이 유행한다. 1944년부터 시행하려던 징병제가 전쟁의 확대와 계속되는 전사로 병력이 모자라게 되자 1943년 8월부터 실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죄명도 형기도 없는 죄수로 전주형무소에 수감중인 송중원은 큰아들 송준혁에게서 어엿한 성인의 모습과 함께 대견함을 느낀다. 자신이 허탁과 함께 고학을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아들이 고학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잊으리라 생각한다. 전동걸은 어머니 홍씨의 부탁으로 금예의 아들에게 배제일이라 작명해 주자 기뻐하는 어머님의 모습뒤에 감추어진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하계 방학을 마치고 이미화와 함께 동경에 간다. 사혁회에서 학병을 피해 탈출하자는 의결이 이루어지고 전동걸은 지요꼬와 함께 만주 조선의용군을 찾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떠나기 전 이미화와 밤을 보내고 살아서 돌아오겠다며 헤어진다. 지요꼬와 부부로 행세하며 경찰들의 검문을 피해 태항산록의 조선의용군에 입대한 전동걸은 3개월간의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마치고 전투요원이 되며 지요꼬는 선전부에 배치된다. 지요꼬의 합류로 조선의용군에 일본여자가 둘이 되었다. 한 대원은 초창기부터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대학, 고등학교까지 일제히 징집영장을 발급하며, 중추원에서는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 징용키로 결정했다. 학도지원병이란 지원은 허울좋은 장식일 뿐이었다. 정도규, 유승현은 점조직을 통해 학도병 대상자를 지리산으로 피신시킨다. 학도병으로 통고받은 송준혁은 운봉의 도움으로 자살하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로 가장하여 지리산으로 피신한다. 한편 박용하는 학병 입영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그대로 교사 생활을 했더라면 어머니가 괄시당하고 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고 자신도 사지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지만 입영날짜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모친 반월댁은 큰며느리로부터 구박받으며 천인침을 뜨러 다닌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종군위안부 모집인의 꾀임에 속아 위안부로 팔려나간다. 남자들이 다 군대에 나갔기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며 매달 30원씩 노임을 준다며 꾀였던 것이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중간에 머무른 부산 수용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잡혀온 처녀들이 예닐곱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란다. 공장에 간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음을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들은 오사카와 시모노세끼로 끌려가 하루에 5~10차례 군인들을 맞이해야 했고, 복실이는 사이공을 지나 랑군으로 끌려갔다. 학도병으로 징병된 박용하는 미얀마전투에 투입된다. 연합군의 폭격에 맥을 못쓰는 일본군을 보고 무적의 황군은 거짓말이며 일본은 형편없이 지고 있음을 깨닫고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낀다. 위안소에서 복실이를 만난 그는 가슴저리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끼며 최초로 피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민동환, 홍명준, 박정애 등이 친일로 돌아선다. 홍명준은 일본인과 사돈을 맺으며 박정애는 국민총력연맹 지부의 간부가 된다. 민동환은 내선일체 정책에 호응했다는 이유로 국민총력연맹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감격스러워 한다.

  비행장 건설장에 끌려간 배필용 등 조선 징용자들 1천여명은 하루에 12시간의 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고향에 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괴로움을 참는다. 그들 중 일부는 도망가다 붙잡혀 맞아 죽고 과로로 병들어 죽기도 하며 호열자병에 걸려 생매장되기도 한다. 오로지 고향에 갈 생각으로 버틴 이들은 결국 공사가 거의 완료되자 기뻐하지만 방공호에 감금당한 채 수류탄과 기관총을 맞고 죽는다. 그러고도 일본은 입구를 시멘트로 봉해버리는 일을 감행한다. 지시마 열도 여러 섬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미 4천여명이 죽어 갔던 것이다.

  사할린 탄광촌에 끌려간 김장섭 등 조선인 징용자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하루에 12시간 이상의 채탄작업을 해야 했다. 탄광의 밥도 쌀은 찾아볼 수 없는 잡곡밥이거나 콩밥이었으며 국은 묽게 푼 다시마 국이었고 단무지 한쪽은 나오다 말다 제멋대로였다. 막노동에 못 이겨 김장섭의 막사 노무자 2명이 도주하지만 곧 잡혀온다. 십장이 갖은 폭행을 하며 동료 노무자들에게 구타를 강요한다. 총독부에서 각지의 성당을 군대용으로 강압접수하고 신부와 신학생들을 노무자나 군인으로 끌어가게 되자 노무자로 끌려온 대전성당의 신부였던 심기헌이 항의하며 차라리 자신이 대신 맞겠다고 한다. 도망했던 노무자를 대신하여 구타당한 그는 독 감방에 갇힌 지 사흘만에 풀려나게 되나 사망하게 된다.

  일본이 군용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이었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갔으나 중일전쟁이 터진 1938년 일반처녀들 1백여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개설하면서 일본군은 낭인패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ꡒ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ꡓ, ꡒ여접원을 하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ꡓ 는 등의 거짓말로 사기극을 벌이며 처녀들을 군용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러다가 1941년 7월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이 직접 나서 종군위안부로 끌어가려고 여자사냥을 시작하고 정신대 문제로 민심의 동요가 심각해진다. 일본은 가급적 도회지와 중류층 이상은 피하면서 비밀리에 실시하여 민심의 동요를 최대한 막으라는 지시를 각 도청에 하고, 이런 연락을 받은 하시모토는 변두리 지역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정신대의 대상이 되는 딸을 가진 집들을 사오십가구 조사하라고 총무과장에게 지시한다. 상점에서 도둑질한 죄 등을 협박하여 그의 딸들을 정신대로 끌어갔다.

  파라오에 위안부로 끌려간 순임이는 연합군의 계속되는 폭격으로 산으로 피신한다. 순임이네 일행은 열셋에서 다섯으로 줄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도마뱀과 쥐도 잡아먹었다. 열사흘째 되는 날 순임이는 폭격을 당해 죽는다. 연합군이 상륙하자 많은 학도병들이 영국군으로 탈주한다.

  차득보네가 징용으로 투입된 곳은 북해도의 도로공사장이었다. 도주하다 붙잡힌 두 명의 노무자는 감독의 강압에 의해 다른 노무자들이 던지는 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는다. 각목으로 급조된 십자가에 매달린 그들은 까마귀의 밥이 되어 사람의 형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로지 공사가 끝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도로공사가 끝마무리되면서 노무자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옮겨갈 곳이 탄광이라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절대로 탄광까지 끌려가지 않을 작정을 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저녁 공사장을 탈출한다. 그리고 아이누족 마을로 도주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조선인 강상호를 만나 피신하게 된다.

  학병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온 학생들 화전민들의 거처를 따라 10명을 단위조직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실시하고 있는 것은 사상학습이었다. 학습하고 토론하는 날들이 쌓이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여 가고 있었다. 피아골의 송준혁이 그런 전형적인 예였다. 그들의 생활규범과 질서를 제시하고 지도하는 총책은 이현상이었다. 한편 평양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학도병들이 훈련소를 탈출하여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다 발각되어 70여명이 검거되는 평양사단 사건이 발생했다. 소작인들을 징용과 징병으로 엄청나게 끌어갔기 때문에 1944년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놀리는 논이 50여 정보로 집게 되었다. 일제는 부족한 전쟁물자의 보충을 위해 식량영단을 통해 무제한 공출을 실시한다.

  지삼출의 아들 지만복은 마흔 하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징병으로 끌려간다. 그동안 만주의 조선사람은 선만일여의 정책에 따라 일본 마음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송화강 건너 하얼빈 외곽지역에 있는 훈련소로 끌려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낙오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며 어린 자식들 때문에 개죽음을 할 수 없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소련군이 8월 8일을 기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소만국경의 관동군들은 그 어느 부대나 이들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지만복은 중대원들과 함께 아무르강(흑룡강)을 건너 소련땅을 밟으며 집들이 있는 동쪽하늘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그러나 높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남만석네 집단 부락에서는 뜻밖의 외침에 놀라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ꡒ왜놈덜이 다 없어졌다! 왜놈덜이 다 도망갔다아!ꡓ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무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일본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주 경찰들도 없었다. ꡒ우리도 얼렁 고향 찾아 가자아!ꡓ누군가가 힘차게 외쳐댔다. 이튿날 아침에 남자들은 자식이 군대에 끌려간 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했다. 결국 다같이 떠나기로 했다. 1백 가구 6백여명의 행렬이 한 20리쯤 걸었을 즈음이었다. 저 왼쪽에서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외치며 손에는 연장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그건 중국말들이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여러 가지 연장이었다. 처절한 비명 속에 피가 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자들을 아이들을 데리고 광막한 벌판 쪽으로 기를 쓰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거의 다 쓰러져 갈 즈음 여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점점 멀리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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