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슬픔과 기쁨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6인의 ’그날 이후‘ 그리고 ’그날 이전‘의 이야기
2009년 정규직 2.646명, 비정규직을 포함한 3천여명 대상으로 정리해고안 발표, 77일간의 옥쇄 파업, 그해 사용된 최루액 95퍼센트가량이 쏟아진 현장, 스물네 명의 죽음, ‘산자(해고되지 않은 자)와 ’죽은 자‘, 희망퇴직자,(’산 자‘였으나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 된 자들과 그들의 가족이야기
파업이 며칠 지나자 공장 안에서 그는 다시 고민했다. '이만하면 나는 할 만큼 한 것 아닐까? 나는 이제 공장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나중엔 사람들이 많이 나가고 3분의 1정도만 남았을때 다시 생각해 봤어요. '이제 할 만큼 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때도 결론은 같았어요.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자. 확실하게 믿자.' 내 평생 살면서 그렇게 마음 편하게 결심한 경우도 없었어요. 결정하고 나니까 갈등은 줄었는데 오히려 결정하고 나서 다른 고민이 많았죠. 결정은 확실한데 그 뒤에 닥칠 일들만은 두려웠죠. (해고되지 않았지만 파업대열에 참가했던 박호민)
수원 연화장에서 그날 엄인섭과 함께 화장되었던 사람은 바로 5월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쌍용차의 해외매각이 이루어진 것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 마음속에는 많은 생각이 오갔다. 누군가는 '이런 기구한 아이러니가 있나?'라고, 누군가는 '노동자나 대통령이나 같이 죽는구나!'라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한 손엔 국화를 들고 한 손엔 쌍차 소식을 알리는 선전물을 들고 영결식장으로 가자."고 했다. 대부분의 쌍차 노동자들은 '노란 풍선아!. 이쪽도 봐줘.'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2005년 쌍용차를 상하이자동차에 매각, 4년간 투자없이 기술만 흡수, 감사보고서 조작으로 정리해고와 매각이 시작될 즈음 스트레스성 뇌출혈로 엄인섭이 숨진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이 마냥 좋은 것 처럼 얘기하면 안된다. 퇴임후 소박한 모습이 좋았던 것이다.
재임시 친미우향우를 주도해서 지지자의 변심을 유도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친노 대표가 되어 책장사를 하고 있다.
몸과 말이 달라도 서로 지식인·사회지도층이라고 추켜주며 먹고 사는 방식은 현대사의 전통이 되었다.)
저녁에 촛불 문화제 할 때 모이라고 하면 쫙 모이고 그럴 때 힘이 쭉 나고.... 그렇게 버텼어요. 실은 매일 잠 못자고 지치기도 했는데 밥 한끼 먹고 나면 또 힘이 불끈 나서 이어가고 그랬어요.
해고자 명단이 통보되기 전에 걱정 많이 했어요. 내가 만약 해고자 명단에 포함 안되면 어쩌지? 당연히 나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다행히 명단에 포함되었더라구요. 안심했어요.
(김정욱. 대자연을 극복하며 살아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방식은 함께 사는 것. 이것을 무시하고 대결과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은 반인간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파업이 끝난 다음 날인 8월 7일 새벽, 그는 자신이 일했던 구로 정비사업소에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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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사업소에 가서 정문을 닫아 버렸어요. "형구씨, 왜 그래?" 하기에 "지금 외부 세력 체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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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서 직장이 내려와서 "형구씨 커피 한잔하자."고 해요, "너무 한 것 아니냐?" 면서,
저 마시라고 사온 캔 맥주를 직장 가슴에 던져 버렸어요. 빡 하고 터져 버렸어요. 거품이 막 일고요, 그 다음에 회사 의무실 가서 발목에 감았던 붕대를 풀었더니 그때까지 피가 계속 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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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고 외부세력이라고 하던 게 계속 생각났어요....
'...너희들이 다 합류해서 파업했으면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를 외부세력으로 몰지 않았으면, 우리를 내부세력으로 생각했으면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외부세력이면 도대체 누가 내부 세력이냐?"
(정형구. 분열 논리에 동조해야 나는 살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누군가 한명이 왕따가 되어야 내가 왕따가 되지 않는다는 두려움. 두려움에 맞서지 않아야 거대권력이 된다. 이에 맞서는 것은 죽음까지 감수해야...)
내가 왜 그러는지 딱 떨어지게 설명 못해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했어요. 대추리에 가야할 것 같았고,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이 죽었을때도 사람이 죽었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주저하거나 발 빼려는 심정 속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결국 행동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이창근.)
파업 들어오고 나서 6월에 해고 알리는 딱지 붙은 봉투가 배달되기 시작했어요. 저는 공장에 갇혀있고 문화부장이라서 체포 영장이 떨어져 있었어요. 밤 10시쯤 집사람에게 문자를 했어요. "노란봉투에 뭐 붙어 있드냐?" ...새벽 1시 쯤 답장이 왔어요. "어."라고 한 단어가 써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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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이유가 없지 않는냐고. 왜냐면 저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일했거든요.
(고동민.)
박정만도 떠나지 못했다. 상이군인 4급 국가유공자인 그는 보훈처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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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성 노조원이 아니었어요. 근데 허망하잖아요. 애들 잡혀가고 나는 안 잡혀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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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훈처 갔더니 회사 들어갈 수 있다고, 어느 쪽으로 가고 싶으냐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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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기다려봐요!" 하고는 좀 있다 그냥 나왔어요.
2009년은 그렇게 끝났다. 세상의 시계는 계속 똑딱 거렸다.
(박정만)
치유 이야기 많이 나오는데 내 생각에 진짜 치유는 돌아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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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안함은 돌아가서 일을 해야지만 사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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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부정당한 기분, 내가 인정 받았던 것이 다 소용없어진 것, 내가 스스로에게 해준 칭찬들이 다 사라진 것 때문에 무기력하게 느껴져요.
(김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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