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제일주의
- 제종철 평전 中
“당장 무엇부터 할 것인가?”
병역특례도 끝나고 본격적으로 지역 운동의 구상을 다듬을 무렵 제종철이 늘 가슴에 품고 있던 화두였다.
모든 일이 예정대로 추진 중이었지만 제종철의 가슴에는 늘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 있었다.
앞으로의 지역 운동은 민중을 정치의 주인으로 세워내기 위한 피어린 투쟁의 산물인 진보정당과 각계각층 부문 운동을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묶어 세우는 전선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기본노선이었다.
노선이 나오면 눈앞에 할 일이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당과 전선의 대중적 토대가 될 각종 대중조직의 역량이 취약한 현실이 눈에 보였다. 대중조직을 세워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한, 미래의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는 대학교가 여러 군데 있었지만, 학생운동은 역량이 편중되어있었다. 학생운동도 강화해야 했다.
할 일이 많을수록 머리는 더 복잡해져 갔다. 그러나 복잡한 가운데, 여러 가지 구상을 하면 할수록 한 가지 절실한 문제로 모든 문제가 집중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문제였다. 지역 운동을 위해 다 바칠 각오를 하고, 어떤 과업을 주더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람, 핵심간부들이 있어야 했다.
핵심간부들을 준비해서 역할을 배치하지 않으면 대중 사업의 성과를 내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성과를 내더라도 그 성과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핵심간부들을 튼튼히 세우는 것이 모든 사업의 선결과제이며 중심고리였다.
‘사람을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제종철의 고민은 깊어졌다. 지역 운동의 오랜 선배들을 만나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토론해 보기도 하고 여러 의견을 들어보기도 했다.
그런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지금의 일꾼들을 호랑이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하는 동지들은 핵심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경험도 풍부했고. 수배와 감옥 생활을 이겨낸 신념과 의지의 투사들이었다.
또 중요한 것은 의리를 지킬 줄 아는 동지들이었다. 다만 제종철이 생각하는 수준에 아직 못 미칠 뿐이었다.
제종철이 생각한 방법은 간단명료했다.
‘핵심은 조직 결정에 충실해야 한다. 회의는 제때에 보장하고, 분공을 정확히 주며, 집행을 철저히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초보적 생활 규율부터 엄하게 세워야 한다. 조직 결정은 사소한 것이라도 귀중히 여기는 기풍을 세우자’
제종철은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간부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기풍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든 제때에 허심탄회하게 보고하는 보고 규율과 제기된 과제를 무조건 이행하는 집행 규율로 나타날 것이다.’
조직 규율을 강화해서 지금 함께하는 동지들부터 핵심으로 키우겠다는 그의 결심은 흐트러짐 없이 관철되었다. 제종철은 이런 결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사람이 지치고 힘들면 타협하게 되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은 지역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지역 단체에서 주관하는 마라톤 대회였는데 지역 단체의 활동상도 볼 겸 거기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런데 제종철은 마라톤을 뛰던 중에 그만 허리가 다시 삐끗하게 되었다. 94년에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가 안 좋았던 터에 마라톤은 무리였다.
그는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 움직이기조차 힘들어하는 그를 보고 동지들은 오늘은 회의가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종철이 회의 장소에 나온 것이었다. 아픈 몸을 끌고 한참을 걸려 회의 장소에 온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곧바로 회의를 시작하자고 했다.
“형, 앉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회의를 합니까? 들어가서 쉬시죠.”
진심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제종철의 대답은 의외였다.
“말은 고맙지만 하기로 한 회의를 미룰 순 없다. 내겐 그럴 권리가 없어. 비록 몸을 다쳐서 앉지는 못하지만. 누워서라도 회의는 할 수 있으니 그냥 진행하겠다.”
충격적이었다. 누워서라도 회의는 제때 반드시 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 멍한 눈길로 제종철을 바라보았다. 제종철은 상황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몸이 부서져도 할 일은 해야지. 몸이 아픈 거랑 약속한 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사람들은 순간 숙연해졌다. 제종철이 원칙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설마 그렇게 아픈데 회의를 하겠느냐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 후로는 누구도 아프다는 이유로 회의에 불참하거나, 사업을 미루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원칙은 누가 세우자 주장한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지도자의 헌신과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었다.
여중생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제종철은 여중생 범대위 상황실 부실장으로 서울 명동성당 부근에 있는 여중생 범대위 본부 회의에 매일 참석해야 했다. 회의는 보통 밤 1시에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경기북부대책위 사업을 같이하고 있던 제종철이 대책위 집행 간부들과 종례를 하고 와야 했기에 회의 시간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밤 1시에 시작한 회의는 새벽 3시나 돼야 끝났다. 워낙 중대한 문제가 많고,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 관계로 회의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늦게 회의가 끝나고 나면 제종철에겐 다시 의정부의 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6시에 진행되는 조회는 일과를 점검하고 분공완수를 결의하는 회의였고, 사업의 긴장감을 높인다는 의의도 있었다.
제종철은 새벽 3시든, 4시든 서울 회의가 끝나면 잠시 눈을 붙이고 5시면 어김없이 의정부로 출발했다. 비록 1~2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조회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제종철의 노력에 힘입어 다섯 명의 운동가들은 지역 운동의 핵심으로 나날이 성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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