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집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 시 인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 그때 가서는
어느날 얼근히 취해
밤거리 노닐다가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마주해보는 밥상이여
후루룩 후루룩 숭늉으로 밥알 넘기고
아랫목에 벌렁 누워
한대 피워무는 담배여
동그랗게 동그랗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여,
다 날아가버려라 그때 가서는
사랑도 증오도, 다 날아가버려라
원수도 원수 같은 거 혁명도
다 날아가버려라 그때 가서는
- 시인이란 것들
밤중에
홀랑 꾀벗고 마누라와 그것을 하다가 열렬하게 하다가
문득 사상이라는 것이 떠올랐다나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가 그것을 수첩에 적어놨더니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하니까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버린다."
- 편지 1
시를 써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네 벽에 가득 찬 것은 어둠뿐인 이곳에서는
돼지처럼 넣어준 콩밥이나 받아먹고
신트림 구린 방귀나 풍기고 사는 이곳에서
시를 써보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가 무슨 신성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펜이 없고 종이가 없고 형편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흙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밝음을 위한 무기 싸움이 없기 없기 때문입니다
내 시의 기반은 대지입니다
대지를 발판으로 일어서서 그 위에
노동을 가하는 농부의 연장과 땀입니다
씨를 뿌리기 위한 바람과의 싸움입니다
뿌리를 내리기 위한 어둠과의 격투입니다
노동의 수확을 지키기 위한 거머리와 진드기와의 피
투성이의 실랑이입니다
추위를 막기 위한 벽과의 싸움이고
불을 캐기 위한 굴속과의 숨바꼭질입니다
대지 노동 투쟁이 기반을 잃으면
내 팔의 힘은 깃털 하나 들어올릴 수 없습니다
이 발판이 없어지면 나는 힘센 자의 입김에도 쓰러
지고 마는 허깨비입니다
내가 한 줄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가뭄을 이기는 저 농부들의 두레에 내가 낄 때입
니다
그들과 더불어 내가 있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사고하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싸울 때
그때 나는 한 줄의 시가 됩니다
- 시를 대하고
시는 저주가 되어서는 안되는가
시는 증오가 되어서는 안되는가
시는 전투가 되어서는 안되는가
별을 노래하듯 시를 노래하고 시를 노래하듯 별을 노래하고
시는 인간의 입김 인간의 육화된 내면의 방귀소리인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어둠의 자식으로 갇혀 있는 한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민중의 자식으로 묶여 있는 한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민족의 노예로 박해받고 있는 한은
시도 사람의 일
신이 아닌 신이 아닌 것도 아닌
일하고 노래하고 싸우고 그러다 끝내 주고 마는
보통 사람의 일인 것이다
한술의 밥 때문에 할퀴고 물어뜯고 살해까지 하는
한가닥 빛을 위해 세계를 거는
단순하고 당돌한 사람들의 일인 것이다
집을, 보습 대일 한 뙈기의 땅을, 빛을 갖고 싶어 하는
제 새끼도 남의 새끼마냥 키우고 싶어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일인 것이다
- 편지 2
어머니 이 밥을 받아야 합니까
식구통으로 들이미는 컴컴한 이 주먹밥을
수갑 찬 두 손으로 받아야 합니까
이 밥을 먹어야 합니까 어머니
가마니때기 위에 놓인 컴컴한 이 주먹밥을
수갑 찬 두 손으로 먹어야 합니까
인간이 도야지에게 밥을 줄 때 이렇게 주던가요 어머니
똥개가 똥을 핥을 때 이렇게 핥던가요 어머니
산다는 것이 어머니 이런 것이던가요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어머니 왜 말씀 못하세요
왜 말씀 못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 혁명의 길
시대의 절정에서
대지의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새벽을 여는 사람이 있다 어둠의 벽을 밀어
혁명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굶주림이 낯익은 그의 형제이고
몸에 밴 북풍 한설이 그의 이불이다
그리고 얼굴 없는 그림자가 그의 길동무고
혁명의 길은
다정히 둘이 손 잡고 걷는 길이 아니다
박수 갈채로 요란한 도시의 잡답도 아니다
가시로 사납고 바위로 험한 벼랑의 길이 그 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피와 투옥의 길이고
죽음으로써만 끝장이 나는 긴긴 싸움이 혁명의 길이다
그러나 사내라면 그것이 한번쯤 가볼 만한 길이다
전답이며 가솔이며 애인이며 자질구레한 가재 도구며... ...
거추장스러운 것 가볍게 털어버리고
한번쯤 꼭 가야 할 길이다
과연 그가 사내라면
하늘의 태양 아래서
이름 빛내며 살기란 쉬운 일이다
어려운 것은
지하로 흐르는 물이 되는 것이다 소리도 없이
밤으로 떠도는 별이 되는 것이다 이름도 없이
- 돈 앞에서
돈 앞에서
흘리지 않는 웃음 없고
걷어올리지 않은 치마 없지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지요
돈 앞에서
굽히지 않은 허리 없고
꿇지 않은 무릎 없지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지요
돈이면 다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에서는 섹스도 인격도 사고 팔지요
- 돈만 있으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렇게 좋은데 돈만 있으면
처녀고 유부녀고 아무나 골라잡아 호텔로 데리고 가고
이렇게 좋은데 돈만 있으면
목욕탕에 팔자로 누워 안마를 시키고
감질나게 미치게 좋은데 돈만 있으면
눕혀놓고 뒤집어놓고 침대에서
짐승이 됐다 사람이 됐다 해괴망측한 짓을 다 하고
미치고 환장하게 좋은데 돈만 있으면
이렇게 좋은데 천하없이 좋은 나한테
뭐라고! 미군 물러가라고!
미군 물러가면 38선은 어떡하고!
거기서는 돈이 맥을 못 추고 니기미
여자도 사고 팔 수 없다던데
무슨 재미로 살아! 무슨 낙으로 살아!
저 가난뱅이들처럼 좆빠지게 쎄빠지게 일만 하고 살란 말여!
늙어 죽도록 마누라 하나로 만족하고 살란 말여!
- 친절에 대하여
처음 내가
서울 구경을 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할 때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사돈네 팔촌도 없는 나에게
'따뜻한 방 있어요'
친절하게 말을 건네주고는
'참한 아가씨 있어요'
앞장일랑 서서는 길까지 안내해준 사람은
서울역 뒷골목의 아줌마였다
그동안 나는 10년을 서울에서 부대꼈다
살냄새 땀냄새 입냄새 사람냄새에 끼여
그동안 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친절을 받았다
하나같이 그들은 제 속에 잇속을 갖고 있었다
잇속 없이 나를
밀어주고 이끌어주고 감싸준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 다 끝내고
다 끝내고
비좁아 답답하고
어두워 외로운
이 징역살이도 다 끝내고
다시 잡아보는 펜이여
다시 거머쥐는 칼이여
원수도 증오도 다 끝내고
사랑도 혁명도 혁명의 방어도
다 끝내고
- 시집 <鎭魂歌>를 읽고
나는 싸웠습니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
한 십년 싸움에 나는 불만이 많습니다 싸움이 미지근했기 때문입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이 미지근한 싸움에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서투른 싸움은 그래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역사로 부터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싸움 그것은 유죄입니다
역사 앞에서
나는 유죄입니다 적어도 이제까지의 나는
피와 살과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인간 그 본질인 노동
그 노동으로 피가 맑아지고 살이 아름다워지고 뼈가
튼튼해지고 근육이 팽팽해져
굳세고 다부지고 건강하고 아름다워지는 인간, 바로
그 인간의 노동의 성과가
노동하지 않는 비인간들(인간이 아닐진대 그것은 짐
승이고 버러지고 기생충일 터)에
약탈당하고 빨리고 털리는 그런 사회에서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관계로 이루어진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주인과 종으로 만
나지는 그런 사회에서
싸움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노동의 적, 짐승이고 버러지이고 기생충인 인간의
적은 죽어야 합니다
짐승이라면 그는 창으로 찔러 죽어야 제격입니다
버러지라면 그는 말발굽에 밟혀 죽어야 제격입니다
기생충이라면 그는 독약으로 독살되어야 제격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형상을 했다 해서 딴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감상은 죄악입니다
나의 시는 내가 싸운 싸움의 부산물 외 아무것도 아
닙니다
내가 한 싸움이 내 맘에 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쓴 시가 내 맘에 들지 않습니다
하물며 독자의 마음에야!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한 매듭의 끝에 와서
(80년대, 저 짓밟힌 풀들과 함께)
한 해의 끝에 와서
내 왔던 길 십년의 길
되돌아보면 그 길
가파른 길에 비가 와서
삭풍에 눈보라까지 쳐서 얼어붙은 길
강 굽이굽이마다
산 굽이굽이마다
눈물자국 핏자국 산전수전이다.
내 왔던 길 그러나
내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다.
그 길
자유의 날개를 꿈꾸고
그 길
동터오는 해방의 아침을 열고
통일의 길
갈라진 땅 하나됨의 길로
치닫는 길이었다.
가시밭길 헤치고
피나는 길 무릅쓰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걸었던 길
치켜든 주먹에
투쟁과 단결의 기치 세우고
어깨동무하고 걸었던 길이었다.
그 길 자유의 길을 가다
어떤 이는 총알에 맞아
부러진 날개의 피 묻은 새가 되기도 했다.
그 길 해방의 길을 가다
어떤 이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
쓰러진 나무가 되기도 했다.
그 길 통일의 길을 가다
어떤 이는 비바람 눈보라에 모가지가 꺾여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들풀이 되기도 하고
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여
나 여기까지 와서 무엇인가
눈물의 천길 계곡인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좌절의 무릎인가
불의의 세계와 싸우다가
도끼와 총알에도 굴하지 않았던 형제들이여
나 아무것도 아니다.
또 하나의 별 그 밑에서 나
억센 주먹의 다짐이 아닐 때
원수 갚음의 원수 갚음의
전진하는 발자국 싸움이 아닐 때
저 쓰러진 나무들과
저 짓밟힌 풀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걸었던 그 길
함께 발맞추고 걸었던 그 길
자유의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내 다시 걷지 않을 때 그 때
나 아무것도 아니다.
한 매듭의 끝에 와서
내 가야 할 길 멈출 때.
-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산은 무너지고 이제 오를 산이 없다 한다
깃발은 내려지고 이제 우러러볼 별이 없다 한다
동상은 파괴되고 이제 부를 이름이 없다 한다
무너진 산
내려진 깃발
파괴된 동상
나는 그 앞에서 망연자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암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파도에게 나는 물어본다
파도는 하얗게 부서질 뿐 말이 없고 나는 외롭다
바다로부터 누구를 부르랴 부를 이름이 없다
꿈속에서 산과 깃발과 동상을 노래했던 내 입술은
침묵의 바다에서 부들부들 떨고 나는 등을 돌려
현실의 세계에 눈과 가슴을 열었다
기고만장해서 환호하는 자본가의 검은 손들
그 손을 맞잡고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는 패자들의
의기양양한 얼굴들
기가 죽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노동과 투쟁의 어제를 입술에 깨물고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들
나는 애증의 협곡에서 가슴을 펴고 눈을 부릅떴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장막 그러나 나는 보았다
먹구름을 파헤치고 손짓하는 무수한 별들을
아직도 그 뿌리가 뽑히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그리고 날벼락에도 꺽이지 않고 요지부동으로 서 있는 불굴의 바위들을
저 별은 길 잃은 밤의 길잡이이고
저 나무는 노동의 형제이고
저 바위는 투쟁의 동지이다
가자
가자
그들과 함께 들판 가로질러 실천의 거리와 광장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자 끝이 보일 때까지
역사의 지평에서
의기도 양양한 저 상판때기의 검은 손들을 지우고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린 투쟁과 승리의 깃발이 나부끼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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