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법비의 난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만주는 흔히 동양의 서부라고 불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뿐이 아니다. 더러운 놈, 비열한 놈, 찌질한 놈, 개 같은 놈, 개만도 못한 놈, 생쥐 같은 놈 등등 온갖 잡놈이 넘치는 무법천지였다. 만주에는 마적, 공비(共匪), 병비(兵匪), 토비(土匪), 산림비(山林匪), 녹비(綠匪), 정치비(政治匪) 등 온갖 비적떼가 난무했다. 만주국이 건국된 1932년 3월, 한 달 동안 비적들이 철도를 공격한 것만 해도 무려 2천여 회에 달할 정도였다.
제국주의 침략권력은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법치를 내세우며 비적을 소탕했다. 일제는 경찰에게 비적으로 의심되는 자를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등 ‘법치’를 강화했으며, 이밖에도 만주 현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온갖 법을 제정하여 만주를 지배했다. 법의 지배는 새로운 비적을 낳았다. 만주의 민중들, 심지어는 일제에 협력하는 만주인들조차도 법만 내세우는 일본 관리들을 법비(法匪)라고 불렀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법률조문을 내세우고 법률기술을 마치 금고털이 기술처럼 써먹는 자들이 바로 법비이다.
용산 참사가 있고 십여 일이 지났건만, 그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 대신 불법시위에 대한 정당한 법집행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만 들려온다. 촛불집회에 대한 강경진압에 이어 지난 12월은 이른바 입법전쟁과 맞물리면서 법치주의의 나팔소리만 요란하다. 민주사회에서 권력자가 법치주의를 들먹거리는 것은 서부극에서 악당이 정의를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법치주의란 권력의 횡포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지도자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서부터 유대인의 ‘절멸’에 이르기까지 그가 한 모든 행위는 제3제국의 적법한 법집행이었다. 1975년 4월9일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신헌법의 법률체계 안에서 적법한 모든 절차를 밟아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고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하지만, 육법전서 어디에도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죽이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이 지극히 ‘합법’적인 법집행을 우리는 사법살인이라 부른다. 국제법률가 연맹은 4월 9일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법치는 ‘살인 면허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권력을 잡은 자에게 법의 이름으로 아무 짓이나 해도 좋다는 면허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자신이 선출한 권력을 의심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의심과 견제를 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삼권분립을 할까?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폭력을 일삼는 도시 테러범이라고 매도되고,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까지 구속시켜버리는 나라에서, 철거현장을 휘젓는 용역깡패가 폭력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경찰과 짝짜꿍이 되어 같이 작전하는 사이가 아닌가.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불법행위로 구속되는 적은 있어도 사용자들이 구속되는 적은 없다. 법이 이렇게 울퉁불퉁 적용되는데 법치주의를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법치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노예제나 신분제가 합법이었던 시절을 피로써 마감하고 민주주의를 세웠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포기한 국가권력이 기득권자의 이익관철을 위해 속도전을 벌이면서 법치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닌다”는 법 중의 법인 헌법이 정한 원칙을 짓밟고,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유린하면서 무슨 법치주의인가. 잔인한 권력이 내세우는 교활한 법치주의, 이것은 국민을 상대로 하는 법비의 난이다. 비적들의 천국 만주에서 온갖 비적들에게 시달렸던 만주의 민중들이 으뜸으로 꼽은 비적이 바로 법비, 너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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