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에서 출생 

부친 전상수는 피복제조업계 봉제 노동자였으며 해방 직후 대구의 노동자 파업에 가담했다가 고통을 겪었다. 모친 이소선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이 일제 경찰에 의해 학살된 후 개가한 모친을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처녀 시절 데이신타이(挺身隊)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다 도망쳤으며, 8·15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결혼했다. 

1954년 6세 

여름 무렵 재봉틀 몇 대로 양복제조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가족 모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머니가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하면서 석 달 가까이 동냥으로 가족을 돌보았다. 그 후 아버지가 임시로 벌어온 돈으로 어머니는 채소 행상을 시작했다. 

1956년 8세 

2년간 모은 돈으로 재봉틀 한 대를 마련한 아버지는 개인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전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처음으로 짧은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 12세 

막내 동생 순덕이 태어남. 아버지 사업이 잘 되어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4·19혁명 전후로 부친이 브로커에게 속아 사업이 망하면서 가족은 이태원 외인주택 근처의 판잣집으로 이사했다. 이해 전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서 남대문국민학교로의 편입 시험에 합격해 잠시 다녔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결국 학교를 4학년에 중퇴하고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이즈음 밀린 방세를 내지 못해 이태원집에서도 쫓겨나 용두동 천막촌으로 옮겨갔다. 어머니는 전태일이 신문을 팔아온 돈으로 고물장수에게서 빈병을 사서 닦은 후 청량리시장에 나가 팔아 보리쌀과 소금으로 연명하였다.

1961년 13세 

아버지의 폭음이 심해지고 어머니 또한 앓아누워 전태일이 여섯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위탁소판매소에서 받은 삼발이, 솔, 소리, 방빗자루, 석쇠 등을 동대문시장에서 판매했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던 무렵 어느 날 위탁판매소에 갚아야 할 미수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생애 첫 가출을 했다. 대구 큰집에 들렀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대문시장 일대에서 1년 동안 구두닦이 생활을 했다. 

1962년 14세 

여름경 몹시 지친 전태일은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도착한 첫날 부산 토박이 구두닦이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구두통까지 빼앗긴 데다 바닷가에서 정신을 잃어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후 열차에 무임승차했으나 실수로 영천역에 내린다. 그곳 대합실에서 주운 백원짜리 지폐다발로 배를 채우고 대구행 기차를 타고 외갓집에 들른 전태일은 외할머니로부터 그전에 이미 대구에 내려와 있던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되고, 1년 만에 가족과 재회했다. 

1963년 15세 

아버지의 작은집의 도움으로 집에서 재봉틀 한 대를 놓고 삯제품 일을 하며 착실한 가장 노릇을 했다. 전태일 역시 아버지를 도와 재봉틀을 돌리는 일에 제법 익숙해져갔다. 5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아버지 재봉일을 도와주고 오후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겨울, 부친이 학교를 중퇴하고 집안의 재봉일을 전적으로 도우라고 하자 동생 태삼과 함께 서울에서 고학하려고 무작정 가출, 상경했으나 사흘 만에 귀가했다. 울화병이 도진 부친의 폭음과 폭행이 심해지면서 집안 살림이 나날이 기울었고, 마침내 사업도 망해 가족은 대구시 내당동 맹아 학교 부근의 흙벽돌로 지은 토막(土幕)의 단칸방으로 옮겨갔다. 

1964년 16세 

아버지의 폭음과 폭행이 심해가던 2월, 설을 하루 앞둔 날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한다고 서울로 떠나갔다. 뒤이어 전태일도 막내 동생 순덕이를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 서울로 가출했으며, 그 후 동생 태삼도 가출해 서울에서 거지생활을 했다. 동생을 돌볼 능력이 없던 전태일은 시청 사회과에 찾아가 순덕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난 후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케이크장수, 우산장수, 평화시장의 시다, 손수레 뒤밀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힘든 생활 속에서 '부한 환경' 이라 이름붙인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이러한 현실과 싸워 이기려는 의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65년 17세 

남대문시장에서 동생 태삼을 우연히 만나 형제가 함께 구두닦이 생활을 했다. 봄에는 '도원'이란 음식점에서 주방 식모로 일하고 있던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난다. 어머니는 건강이 몹시 쇠약한 상태였으나 생활 터전이 없어 함께 생활하지 못했다. 건강이 다소 회복된 어머니는 중앙 시장에서 우거지를 주우며 거지아이들과 생활을 같이했다. 여름경 전태일은 중부시장에서 순옥이를 만나고 그곳에서 재단일을 하고 있던 부친과도 재회하여 가족이 다시 함께 살게 됐다. 이어 천호동 보육원에 맡겨져 있던 막내 동생 순덕이를 데려온다. 가을, 전태일은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시다)으로 취직을 했다. 

1966년 18세 

미싱일에 경험이 있었던 전태일은 남달리 빨리 기술을 익혀 곧 미싱보조가 되었으며 가을에는 평화시장 뒷골목의 통일사에서 어린아이들의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이 가슴을 압박해왔으며 평화시장의 노동참상에 대해 억울한 생각을 가지게 됐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가 되면 업주와 협의하여 시다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전태일은 미싱사 월급을 포기하고 한미사에 재단보조로 취직했다. 당시 도봉산 기슭에 살던 전태일은 버스값으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어다니다 통금시간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1967년 19세 

2월 24일 드디어 한미사 재단사가 되었으나 원하는 대로 여공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자신 또한 매우 혹사당한다. 전태일은 처음에 호인이라 생각했던 한미사 주인의 이중성을 겪으면서 업주와 종업원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연말에는, 직장 내의 여공들에게 너무 인정이 많은 전태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한미사 주인에게 해고당해 직장을 옮겼다.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을 밝힌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됐다. 





1968년 20세 

전태일은 낮에는 직장에서 재단사 친구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재단사 모임을 조직하는 조직자로, 밤에는 팟잣집에서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내일의 밝은 노동조건을 꿈꾸는 청년노동자로 성숙해가고 있었다. 봄경 재단사 친구 김개남(가명)을 알게 되어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말에는 김개남에게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개선을 추진하기 위해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1969년 21세 

연초부터 김개남과 함께 재단사 친구들을 만나 모임을 만들기 위해 몇 번의 사전 회합을 가졌으며 모든 재단사들이 자신처럼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실망을 하기도 했다. 6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6월 말경 전태일이 주도한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가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회장에 선출됐다. 

바보회의 활동 목표는 '첫째, 평화시장 일대의 3만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투쟁하자, 둘째 조직을 확장하고 근로기준법 및 노동운동 실태를 조사해 근로감독관에게 시정토록 요구하자, 셋째 독지가를 찾아내어 근로기 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 후 빚을 내어 심태식이 지은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을 구입해 시간이 날 때 마다 책을 읽고 또 익혀나갔다. 한문투성이인 책을 읽느라 어려움을 겪은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이즈음 평화시장 일대의 근로조건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보회 소문이 퍼져 위험분자로 낙인찍힌 전태일은 늦여름 경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바보회 또한 사실상 해체되고 만다. 가을에는 두 달 가량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했다. 





1970년 22세 

1969년 가을부터 1970년 봄까지 번민을 거듭하면서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상'을 형성해 나갔다. 4월부터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4개월가량 잡역부로 일했으며, 이 시기에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형제들 곁으로 돌아가고자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린다. 9월, 다시 평화시장에 모습을 나타낸 전태일은 왕성사 재단사로 취직하였으며 바보회 회원 중 남아 있던 6명과 새로 규합한 6명의 재단사들과 새 모임을 꾸리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신문사, 방송국 등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를 진정했다. 9월 16일, 재단사 친구들과 함께 바보회에서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꾼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으며 회장에 선출됐다. 이 모임은 '평화시장의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한 새로운 투쟁조직이었다. 

10월 초순경 전태일은 다시 해고됐다. 삼동친목회는 평화시장 근로자들을 상대로 근로조건에 대한 설문지를 돌려 126매를 거둬들였다. 삼동친목회는 '청원'과 '진정' 대신에 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하고 10월 6일에 회수한 설문지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작성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장 앞으로 보내고, 그 내용을 신문사들에 투고했다. 10월 7일,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에 대한 기사가 실리자 평화시장은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특히 <경향신문>은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와 함께 '근로조건 영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등의 부제를 달아 사회면 톱기사로 다루었다.

10월 8일, 전태일·김영문·이승철 3인은 삼동침목회 대표 자격으로 8개항의 건의사항을 평화시장주식회사에 제출했으나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삼동친목회는 10월 20일 노동청 정문 앞에서 데모를 계획했으나 근로감독관과 업주들의 회유로 중단했다. 다시 10월 24일 평화시장 앞에서 데모를 계획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평화시장 측과 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실패했다. 이때 업주들로부터 11월 7일까지 평화시장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이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친목회가 중심이 되어 11월 3일 평화시장에서 데모를 하기로 계획했으며 이날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했다. 

11월 2일 아침, 전태일은 마지막으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그날 저녁 친구 집에서 데모에 쓸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11월 13일 오전부터 평화시장에는 그전보다 불어난 경비원들과 출동한 경찰대에 의해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낮1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시장 앞에 모인 500여 명의 노동자들과 경찰 및 평화시장 경비원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오후 2시경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나타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채로 몸에 불을 당겼다. 불길에 휩싸여 거리로 뛰쳐나온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침과 함께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을 집행했다. 

숯덩이처럼 온몸이 그을린 전태일,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메디컬센터에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어머니 이소선 앞에서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유언과,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밤 10시경 이 땅의 영원한 청년노동자 전태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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