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된 안보 위기와 축소된 경제위기
희망은 전략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격언입니다.
주식투자뿐 아니라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요. 위정자가 타당한 근거 없이 주관적 바람이나 욕망으로 국정의 목표를 정하고 정책을 펼친다면 그 나라 정치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 것입니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행태를 보면 이 말이 딱 맞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13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 대통령과 김기현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신임 지도부 만찬이 있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민주노총 수사를 언급하며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는 잘못”이라고 대공 수사권 폐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국민의힘 지도부는 다음 날 “민노총(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을 빙자한 간첩단이 암약하는 근거지”라며 “당력을 모아 종북 간첩단과 전쟁을 선포한다”(김기현 대표)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는 때를 맞춰 ‘북한지령설’을 크게 보도했지요. 민주노총을 ‘간첩단 근거지’라고 매도하며 노골적인 공안몰이에 나선 겁니다.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는 3년의 유예를 거쳐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됩니다.
고문과 조작을 통해 간첩을 양산한 국정원(중앙정보부-안기부)의 흑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 입법이었는데,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이제 와 이를 뒤집겠다고 근거 없는 여론전을 벌이고 국정원은 여기저기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돌아치고 있습니다.
명분도, 근거도 없는 무책임한 공안몰이는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선택일 뿐입니다. 공작으로 만들어낸 안보 이슈를 과장해 불안 심리를 자극한다고 정권에 닥쳐오는 위기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는데요. 3월 31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11월 말 이래 처음으로 지지율이 30%로 떨어졌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는 야유와 규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지금 세계적인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혹한 안보 상황,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현 상황을 진단하면서,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한일 간의 첨예한 현안인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나 종군 위안부 등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일본의 반성과 사과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협력의 필요성만을 강조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이런 대통령은 없었습니다.
이어 정부는 3월 6일 일본의 강제 동원 피해 배상 해법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국내 기업 출연으로 재원을 마련해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강제 동원 가해 일본기업은 사과도, 배상도, 참여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피고 기업의 배상 책임을 확정한 대법원의 판결을 정부가 부정하고 어기는 것이라 ‘법질서와 원칙’을 허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3·16 도쿄 한일 정상회담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정부의 해석과 대법원판결이 다르다”면서 우리나라 대법원판결을 부정하고 일본 피고 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민법상 권리인 구상권 청구 배제를 약속한단 말인가요. 친일매국의 역사적 참사라는 거센 비판과 뜨거운 분노가 들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국민적 분노는 영토 문제와 역사문제에 와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공식 브리핑에서 “(기시다) 총리가 한일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구했다”고 밝히고,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현안에 “다케시마(독도) 문제도 포함된다”고 답했습니다. 한일 양국 사이에 가장 민감한 현안이 정상회담에서 다뤄졌다는 것이 일본 측의 설명인데,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위안부 문제든 독도 문제든 논의된 바가 없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그 이후 박진 외교부 장관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다 공개할 수가 없다”고 얼버무렸습니다. 이쯤 되면 일본 측의 주장에 윤석열 대통령이 한마디도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교 참사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워싱턴 백악관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악관은 6일 한국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 뒤 즉각 바이든 대통령 명의의 성명을 공개했습니다. 성명은 “오늘 한국과 일본의 발표는 미국과 가장 가까운 동맹국 간의 협력과 파트너십에서 신기원적인 새 장을 장식했다”고 환영했습니다.
미국은 자정 시간대임에도 바이든 대통령 외에도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 등이 지지 성명을 쏟아냈고 4월 말 윤 대통령의 국빈 초청을 발표하였습니다. 일본에 대한 영토 문제까지 입 다무는 굴욕외교의 답례품이 4월 말 한미 정상회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이렇게 반색하면서 환대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은 대중국 보루를 만드는 데 집중하기 위해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서로 잘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한·미·일 3각 동맹 강화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핵심 고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요.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을 위해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과 확장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 견제에 소극적인 인도를 대신해서 오커스(AUKUS. 호주·영국·미국의 안보 동맹체)를 활성화하면서 호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지요.
다른 한편으론 충실한 동맹국들인 일본과 한국 사이의 군사동맹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미·일 3각 동맹은 대등한 동맹이 아니라 상하 서열이 분명한 동맹입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고 일본을 동북아의 중심으로 삼아 한국을 하위 파트너로 참여시키는 종속적 구조입니다. 윤 정부는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하기 위하여 한일 관계 ‘정상화’를 속전속결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한국과 일본은 동맹이 될 수 있을까요? 영토 분쟁을 하는 나라 중에서 동맹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세계 어느 역사에도 없습니다. 국가의 근본이익을 달리하는 사이에 군사동맹은 불가능합니다. 마이클 길데이 미국 해군 참모총장은 지난 1월 13일 “한국과 일본의 역사 불화는 동북아 안보 위협을 간과한 행위”라는 발언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의 안보 위기를 보고 있는 미국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한일 관계 문제이겠지만 독도 문제와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는데 우리 국민 누가 한일군사동맹에 동의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이 안보 위기론, 전쟁 역할론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의 정보 및 군 당국 책임자들을 중심으로 대중국 전쟁 발언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이클 미니헌 미 공중기동사령부 사령관은 휘하 장병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중이 2025년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면서 잠재적 충돌에 신속히 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군부뿐 아니라 외교관 출신인 중앙정보국(CIA) 윌리엄 번스 국장은 “20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전쟁 발발 위험이 커지는 게 현실”이라고 단언했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안보 위기를 극대화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패권 질서를 재편하는 중입니다. 안보 위기를 과장하면서 동맹의 틀에 종속적으로 묶어두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붕괴로 시작된 경제적 위기를 동맹(이웃) 국가들에 전가하고 있지요.
안보 위기에 대한 미국의 이런 인식은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그대로 전이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체제 위기에 직면한 집권 세력은 더 적극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굴종하면서 지배체제의 안정을 꾀하려고 합니다. 민중의 힘에 의거해서 체제의 변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생각은 없고 오직 외세에 의존해 나가려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모습과도 같습니다. 윤 대통령은 작년 말에 “압도적 전쟁 준비”라는 호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일본 열도 위로 [북한] 미사일이 지나가는데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 하며 일본의 군비 증강을 두둔했었죠. 정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고 외교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윤 대통령의 외교 행보에는 어디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마치 전쟁을 바로 앞둔 것 같습니다.
지난 2월부터 3월까지 한반도 일대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미국의 전략자산이 전개되었으며 규모 면에서 세계에서 제일 큰 한미 연합훈련(전쟁연습)이 진행되었습니다.
자유의 방패(FS)라 이름 붙은 한미연합훈련은 이전의 훈련과 다르게 북한 각 지역을 점령, 안정화하는 작전을 실행하는 것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 자위대와 영국군까지 참가하는 연합훈련이 진행되었습니다. 2월과 3월 한반도는 마치 전쟁터와 같았고 강 대 강의 심각한 군사적 대치와 긴장이 최고조로 높아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4월에도 계속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위기는 안보 위기가 아닙니다. 경제위기, 민생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전히 고물가 상황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1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에너지 요금 인상의 여파로 5.2% 올랐고 조금 내렸다고는 하지만 2월 소비자물가상승률도 4.8%입니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3월 물가지수도 대체로 4%대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높은 물가 수준입니다. 불안한 점은 지난달 외식 물가지수가 115.45로 지난해 동월보다 7.5% 올랐고 가공식품 물가는 10.4%가 올랐습니다. 물가상승 압력 때문에 막고 있는 가스, 전기, 수도 요금 등의 인상도 줄줄이 대기 중입니다.
높은 물가상승으로 실질임금이 감소하면 민생은 극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고용노동부 3월 30일 발표에 따르면 고물가를 고려한 '실질임금'(명목임금X100/소비자물가지수)은 하락 폭이 매우 컸습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2%를 기록했던 지난 1월(소비자물가지수 110.10) 노동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426만 3천 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감소율이 5.5%였습니다. 지난 1월 -5.5%는 지난해 2월 -9.8% 이후 11개월 만에 가장 큰 하락 폭입니다. 실질임금은 지난해 4월(-2.0%)부터 10개월 연속 전년 같은 달보다 하락했습니다.
임금은 줄고 물가는 높은 상황에서 금리가 오르면서 원리금 상환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 대출금 연체가 사상 최고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말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과 저축은행·보험사·여신전문금융회사 등 주요 금융사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연체 금액은 1조 20억 원으로 전년보다 54.7% 급증하며 사상 최고로 증가했습니다. 특히 저축은행의 지난해 주담대 연체액은 289억 원으로 전년(154억 원)보다 87.8% 늘며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고, 보험사의 주담대 연체액도 전년 대비 67.92% 증가했습니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신용대출의 연체액은 지난해 2조 5,730억 원으로 사상 처음 2조 원을 넘었습니다. 최근 5대 은행의 2월 가계 신규 연체율 평균은 0.07%, 기업 신규 연체율 평균은 0.10%로 집계되었습니다. 고금리와 경기침체 여파로 상환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인데 신용대출은 담보가 없는 대출이라 손실이 발생하면 이를 금융사가 그대로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불안한 신호로 받아들여집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출이 많이 증가하였고 대출 만기 연장·이자 상환 유예 조치가 지난 2020년 4월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부실한 대출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몇 가지 위기 지표는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동산 PF 대출 문제입니다. 부동산 PF는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대출이 이루어져 있어 미분양이 누적되면 금융사들은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PF는 공사를 맡은 건설사들이 담보를 서고 건축물을 분양한 다음에 갚는 구조인데 미분양이 쌓이면 그대로 부실이 되는 것입니다. 올 1월 현재 전국 주택 미분양은 7만 5,359채에 달합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해 말 기준 부동산 PF 대출 잔액은 116조 5,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이 중 4월 이후 만기가 돌아오는 PF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 규모만 약 30조 원이며 6월 이후 위기가 본격화될 전망입니다. 이미 지방 건설사에서는 위험 신호가 감지되고 있는데 ‘벚꽃이 피는 순서대로 PF 좌초 위기’라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부채거품에서 시작된 신용위기는 금융시스템의 위기로 전화될 수밖에 없는데 최근 미국 SVB(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에서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발생한 미국과 유럽의 주요 은행들의 위기는 천문학적으로 확대된 부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부채의 확대가 결국은 금융시스템을 한순간에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것입니다. 금융산업은 실물경제와 달리 부채(거품)로 성장하는 산업인데 부채거품이 붕괴하면 신용이 파괴되고 결국은 금융시스템 자체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갈 것입니다.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SVB 사태를 진화하려고 “모든 예금을 보장하겠다”라고 했다가 하루 만에 “아니다”라고 말을 바꿔가면서 진땀을 뺀 것은 그만큼 미국식 금융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죽 다급했으면 미국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해서 1년 동안 거둬들인 6천억 달러 중 2/3가량을 불과 일주일 만에 시중에 다시 풀었을까요. 이러면 인플레이션은 전혀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심화하는 경제위기, 체제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안보 위기가 아니라 경제위기에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안보 위기를 과장하면서 미국의 전략에 편승하면 체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주관적 욕망은 허망한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조선왕조는 동학 농민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가 끝내는 일제의 손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제 명을 다한 낡은 체제를 변혁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윤석열 정권의 종착지와 조선왕조의 종착지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석기 의원 사면복권과 새로운 백 년’ 교양지 '새로운 백 년' (2023. 04. vol. 23)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