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중 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민중이 중심이 돼,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군사 반란 세력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항쟁입니다.
당시 광주 시민은 군부세력이 실행한 5·17 비상계엄등 헌정 파괴 조치에 항거했으며, 군부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지속적으로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주민을 학살하며 진압했습니다.
1. 개요
1979년 박정희가 최측근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망한 직후, 보안사령관 전두환등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하고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18년간의 군사 독재가 끝나 ‘서울의 봄’을 만들기 위해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본격 시작했고, 신군부의 집권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커지고 있었지만,
중앙정보부까지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북괴남침설’을 조작 유포하며, 정권 장악을 목적으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5월 17일), 모든 정치활동 금지∙휴교∙언론검열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을 구속, 감금하고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광주 전역에는 공수특전대를 투입하여 폭력을 가중하며 혼란을 더욱 키워갔습니다.
공수부대원의 폭행 살상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남녀노소 모두가 거리로 나서면서 민중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습니다. 3천여명의 공수부대와 경찰은 도검은 물론 조준사격과 난사, 헬기까지 동원하여 광주시민을 공격했지만, 목숨을 걸고 맞선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마침내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습니다.
외곽봉쇄, 통신과 모든 물자가 차단된 광주는 고립무원의 상황이었지만, 시민들은 배식을 비롯한 자치를 실현하며 단 한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시민항쟁대책위원회는 계엄군에게 사과와 명예회복, 병력철수를 요구하였으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시민군을 살인 진압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한 학살을 묵인하였고 전두환 정권을 공개지지 함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518항쟁은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생과 노동자들은 80년대 내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분단을 빌미로 반민주세력을 지원하는 미국의 공작을 중단하라는 민주화 운동을 지속했고, 그 힘은 1987년 대규모 항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1988년 국회 5.18 진상 조사 청문회를 통해 당시의 진실이 일부나마 국민들에게 공개되었음에도,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대통령 김영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검찰 공안부장 장윤석)는 궤변은 반복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국민적인 항의가 다시 들불처럼 번짐에 따라 검찰은 재수사에 돌입할 수 밖에 없었고, 1997년 대법원은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판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2. 과격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를 계획하면서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미 5월 10일부터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 배치 방안을 논의했고,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주요 지역을 점거했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전쟁시 적진 내부에서 폭력 살상으로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인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 자체가 광주를 제물로 삼아 집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습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명분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행태는 1945년 미군정시기부터 확립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극단적인 역사관에서 비롯했습니다. 이러한 인식과 논리는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에게도 시위대를 ‘국민’이 아닌 ‘적’으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 “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의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제주도민 학살, 전쟁기간 전국적으로 벌어진 양민 학살에 이어 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은 미국의 동북아 정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중들이 매번 큰 희생을 감내하며 민주질서를 회복할때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들은 분단논리를 앞세우며 미국의 지원하에 정권을 유지하려 해왔습니다.
3. 평가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독재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은 독재로부터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됐다”(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
518 항쟁은 미국의 지원하에 전통적인 분단논리를 이용한 군사반란에 항거한 항쟁이었고, 목숨을 걸고 나선 노동자 민중들의 모습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군사반란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해주었습니다.
또한,진정한 민주주의란 우리 민중 스스로 책임있게 결정할 수 있으며, 외부에서 강제하는 대결 구도를 남북이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 대등한 한미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역사의 과제임을 교훈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2018년 427 판문점선언) 1조 1항
#518 #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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