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1/2)
민족민주열사
민족민주열사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인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투쟁하다 산화하신 분들을 말합니다. 대한민국이 헌법에 명시하고 있듯이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이었다면 국가에서 민족민주열사의 무덤을 조성하고 관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이들은 민족민주열사의 죽음을 외면해 왔고, 심지어 은폐까지 했습니다.
모순의 근원을 해결하고자 한 사람들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을 하던, 민주화운동을 하던 결국 마주하게 되는 두 가지 큰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분단과 불평등입니다.
분단체제는 대륙으로의 진출을 제한하고, 극단적인 대립을 유도합니다. 불평등 체제는 약자에게 더없이 가혹한,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하지요.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우리 삶의 모습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은 이렇듯 화해협력과 통일, 민주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대표적인 묘역입니다.
1969년에 공원묘지가 만들어지고 1969년 권재혁 열사, 1970년 전태일 열사, 1971년 김진수 열사, 1973년 최종길 열사가 모셔진 이후 50여 년에 걸쳐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사회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열사 150여 분이 모여 있는 묘역입니다.
경기도 마석 외에도 광주 망월동과 경남 양산 솥발산에도 민족민주열사 모역이 있는데요, 오늘은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된 열사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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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최초로 안장된
권재혁 열사(1925- 1969, 44세)
서울대 문리대, 미국 오리곤대 경제학부에서 학업을 하다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수 등을 역임한 권재혁 열사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68년 중앙정보부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조작하고 권재혁 열사를 당수로 지목한 뒤, 북한을 고무 찬양 추종하는 반국가단체, 내란 예비음모 등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1969년 9월 23일 사형을 확정하고,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2009년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만든 조작 사건임을 확인했고, 배제와 차별 속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가족들의 재심 청구로 2014년 대법원은 권재혁 열사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968년 중앙정보부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조작하고 권재혁 열사를 당수로 지목한 뒤, 북한을 고무 찬양 추종하는 반국가단체, 내란 예비음모 등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1969년 9월 23일 사형을 확정하고,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2009년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만든 조작 사건임을 확인했고, 배제와 차별 속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가족들의 재심 청구로 2014년 대법원은 권재혁 열사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정상적인 집회조차 경찰력으로 방해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개최하고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산화하였습니다.
돈이 없어 연명치료도 받을 수 없었던 전태일 열사는 그날 밤 10시,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뤄달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삶과 생각이 알려지면서 전태일 열사는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동지들은 마침내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였고,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1929~2011)는 한평생 아들의 뜻을 이어 투쟁하시다 전태일 열사 곁에 안장되었습니다.
돈이 없어 연명치료도 받을 수 없었던 전태일 열사는 그날 밤 10시,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뤄달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삶과 생각이 알려지면서 전태일 열사는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동지들은 마침내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였고,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1929~2011)는 한평생 아들의 뜻을 이어 투쟁하시다 전태일 열사 곁에 안장되었습니다.
‘개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뭉쳐서 인원감소를 막고 나의 인격과 권리를 찾아야 한다’
10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행상과 노동하며 생계를 꾸리던 김경숙 열사는, 1976년 서울 YH무역에 입사하고 노동조합을 만났습니다, 노동조합을 통해 스스로 소중한 존재임을 알았고, 야학과 대의원 활동을 하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새 삶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조합원 중심의 민주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노동조합은 1979년 미국으로 자금을 빼돌리고 폐업을 선언한 사측의 위장 폐업에 맞서 120일간의 공장 내 농성에 이어 당시 야당인 신민당사 농성을 전개하였습니다. 권력의 비호 아래 야반도주를 일삼는 악덕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생존권을 짓밟은 악덕 기업주를 처벌하기는커녕, 농성 3일 차 새벽 2시에 경찰력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김경숙 열사가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경찰은 그가 30분 전에 자해하고 투신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2008년 부검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검토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오히려 손등과 후두부에 쇠 파이프 및 날카로운 것으로 가격당한 치명적 상처가 있었음을 확인 발표했습니다. 1979년 8월 여름,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과 김경숙 사망사건은 10월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결국 박정희 유신체제는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조합원 중심의 민주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노동조합은 1979년 미국으로 자금을 빼돌리고 폐업을 선언한 사측의 위장 폐업에 맞서 120일간의 공장 내 농성에 이어 당시 야당인 신민당사 농성을 전개하였습니다. 권력의 비호 아래 야반도주를 일삼는 악덕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역사적인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생존권을 짓밟은 악덕 기업주를 처벌하기는커녕, 농성 3일 차 새벽 2시에 경찰력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김경숙 열사가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경찰은 그가 30분 전에 자해하고 투신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2008년 부검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검토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오히려 손등과 후두부에 쇠 파이프 및 날카로운 것으로 가격당한 치명적 상처가 있었음을 확인 발표했습니다. 1979년 8월 여름,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과 김경숙 사망사건은 10월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결국 박정희 유신체제는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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